(서울=연합인포맥스) 한창헌 기자 = 1980년대 '농구대잔치'의 열기에 흠뻑 젖었던 금융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한국은행 실업농구팀을 떠올릴 것이다. 50년 역사의 한은 농구팀은 프로리그가 출범한 지난 1995년 해체됐다. 농구팀 해체 이후 농구코트를 펄펄 누비던 스타들은 대부분 한은맨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현재 한은에 남아 있는 전직 선수들은 16명. 팀 해체 이후 17년이란 시간이 흐르다 보니, 팀 막내도 어느새 40대를 훌쩍 넘겼다.

17일 농구팀 고참급인 조명선 차장(팀장보)을 만나 스포츠 선수 출신 한은맨의애환을 들어봤다. 조 차장은 현재 발권국 화폐관리팀에 근무 중이다. 1960년생, 53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탄탄한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 차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팀을 선택할 때 직장의 안정성을 많이 고려했고 그래서 한은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한은은 안정적인 직장으로 손꼽혔던 모양이다. 실업팀은 지금의 프로팀과 달리 은퇴 후 소속 회사에 근무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경제권력 구도에서 은행의 힘이 막강하던 때였다. 당시 많은 유망주가 삼성과 현대, 기아 등 기업실업팀 3강을 뒤로 하고 한국은행이나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은행권팀을 선호했던 이유다.









조 차장은 농구명문 양정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4년 한은팀에 합류했다. 농구경기장에 '오빠부대'를 몰고 왔던 농구대잔치가 막 개막하던 때였다. 1년 정도 코트를 누비다 상무부대에 입대했다. 1987년 한은팀에 복귀하고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해 농구대잔치 올스타전에 뽑혔다. 조 차장이 속한 올스타 소장팀에는 '농구천재' 허재도 있었다. 조 차장은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농구코트에서 은퇴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현역 시절 국고부 등에서 근무하기는 했지만 온전히 종일 업무를 보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강릉본부에 자원했다. 당시 지방 근무는 필수코스였다. 과장(4급) 승진시험에 본격적으로 도전했다. 모든 직원들이 예외 없이 거쳐 가는 과정이지만, 사실상 운동에 올인했던 터라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한은내 유일한 승진시험인 4급 코스는 지금도 악명이 높다. 석·박사 출신들도 매년 몇 명씩 물을 먹기 일쑤다. 조 차장은 수면시간을 3~4시간으로 최소화해 열공 모드에 들어갔으나 번번이 낙방으로 이어졌다. 합격의 기쁨을 맛본 건 첫 도전 후 4년이 지난 뒤였다.

조 차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정말 힘들었다. 농구팀 후배 중에서 아직 과장 승진을 못 한 친구들도 있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그동안 업무부와 저축부, 안전관리실, 발권국 등 주로 현업부서에서 일했다. 목포본부와 인천본부, 광주본부 등 지방근무도 많았다. 대부분 농구팀 선후배들이 그랬다. 한은 내 핵심으로 통하는 정책부서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지난해 광주본부에 있다가 본사 국제국으로 발령이 났다. 막상 정책부서로 가기는 했지만 1년여 간 마음고생이 많았다. 전문적인 업무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다. 한은 생활 28년차로 청춘을 바친 곳이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업무를 맡기면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왔다. 그동안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직급과 나이는 문제가 안 됐다는 게 그의 얘기다.

애정이 큰 만큼 아쉬움도 있다. 자신을 포함해서 한은맨들이 중앙은행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중수 총재가 직원들에게 줄곧 강조해온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한은 직원들은 순진하고 착하지만 사회에 대한 적응력은 떨어지는 것 같다. 조직의 보호를 잘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저 또한 혜택을 많이 받아온 게 사실이다. 바깥으로 눈을 돌려서 보면 더 좋은 기회가 많다는 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라톤과 등산이 취미다. 한은 아마추어 농구팀에서 20대 젊은 후배들과 같이 게임도 한다. 얼마 전부터는 코리안리재보험 소속 농구팀을 맡아 무보수로 지도를 해주고 있다. 한은에서는 보기 드물게 직장생활과 대외활동 모두에서 열정이 넘치는 그였다.

운동선수 시절과 한은 생활의 애환 등을 담은 자서전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용도는 아니다. 오롯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개척하겠다는 의미다.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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