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 JP모간체이스은행 상무>



<편집자주: 유리천장.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뚫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융시장도 4대 은행에 여성임원이 없을 만큼 두껍기로 소문난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고 상위 1%로 우뚝 선 여성 금융인들을 만나봤다. 신입사원 시절 조그만 실수에도 주눅이 들고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직원이 실력파 임원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리천장 아래서 연약한 꽃으로 남기보다 이를 뚫고 큰 나무가 되는 쪽을 택한 베테랑 여성 금융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영 기자 = 처음 RM(릴레이션쉽 매니저)를 맡은 것은 1994년이었다. RM은 기업고객을 대상으로 상품을 소개하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주는 첨병 역할을 한다.

그 해 5월에 RM업무를 처음 시작하고 석달쯤 지났을까. 직속 보스가 신참이었던 조승희 JP모간체이스은행 서울지점 글로벌 기업금융부 상무를 자리로 불렀다.

"기대했던 것 보다 못 미친다"

평소 업무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 온 보스가 일침을 가한 것이다. 주니어였던 조 상무에게 그 말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은지점에 입행한 후 신용장 업무나 무역업무를 주로 맡아왔기 때문에 시키는 일을 잘하는 것에 길들어 있었던 때였다. 수동적 마인드로는 안된다. 보스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 직접 고객 개발에 나서고 열심히 약속을 잡아가며 발로 뛰었다. 다시 석달이 지났다. 조 상무에게 기회가 왔다.

한 종금사의 달러 펀딩을 어레인지하는 큰 계약을 따낸 것이다. 금액은 5천만달러.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지금 조 상무는 JP모간체이스은행에서 RM 부문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만일 그 때 상사의 말 한마디에 풀이 죽어 회사를 관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은행, 증권에 이어 국내기업, 다국적기업까지 두루 기업 고객들을 만나온 그의 18년차 RM 이력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력서를 뿌려라 = 대학 졸업 후 취업 고민에 빠지는 것은 지난 198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 때는 여자여서 입사지원서를 내는 것 자체가 마음대로 안됐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한 여직원을 채용하는 기업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기업 채용일정 지원자격에는 '군필'이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한숨 짓던 조 상무에게 힘이 돼 준 것은 여자 선배들이었다.

"선배들이 어디갔나 잘 살폈어요. 보니까 외은지점 쪽에 계시더라고요. 선배들을 찾아갔어요"

어려운 취업 사정을 이미 겪은 바 있는 여자 선배들은 영문 이력서를 만들어서 회사들에 뿌리라고 조언해줬다. 외은지점 문을 직접 두드리며 정면 돌파한 것이다.

"광화문 교보빌딩에 외국계은행들이 모여있었는데 꼭대기층부터 차례차례 은행마다 영문이력서를 10장 정도 뿌렸죠. 그 때 뱅크오브보스톤 은행이 있었는데 카펫이 쫙 깔려있고 너무 멋진거에요."

이력서를 20장 가져가서 뿌리고 온 후 마음속에 콕 찍어뒀던 보스톤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조 상무는 은행 문을 열었다.

▲과감해야 바꿀 수 있다 = 입행 후 조 상무가 맡은 일은 무역신용장, 무역업무였다. 초반에는 텔렉스 사용도 신기하고 모든 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책상에 앉아서 주로 서류심사를 하는 일은 1년 넘게 하니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백오피스 업무 대신 심사부나 프론트오피스 쪽이 더 재미있어 보였다.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 사우캐롤라이나 대학에서 2년간 MBA 공부를 했다. 그리고 다시 외은지점인 DBS에서 1년간의 미들오피스 업무를 거친 후아랍뱅크에서 원하던 프론트오피스 쪽으로 일을 찾았다. 과감한 선택이 그의 인생을 조금씩 바꾼 셈이다.

JP모간체이스은행까지 5군데 외은지점을 거쳤고 은행에 근무한지도 벌써 24년이지났다. 그럼에도 조 상무는 노하우에 대해 묻자 진지하게 말한다.

"이 일은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합니다. 경력이 있다고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고객의 기대감이 주니어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그만큼 맞춰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도 크죠"

▲"신뢰받는 어드바이저가 돼라" = 기업 고객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와 상품 제안까지 두루 맡고 있는 RM은 그만큼 사람들과의 관계에 공을 들일 수 밖에 없다.

"수줍고 아이스브레이킹을 잘 못하면 안돼요.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시간이 재미있어야죠"

그는 고객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RM의 역할이나 고객이 원하는 것을 해준다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단기간의 관계가 아닌 신뢰받는 어드바이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RM은 은행의 리스크를 줄이고 고객의 요구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수익이 좋아서 팔기보다는 항상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보고 은행 입장을 잘 조율해야 해요. 은행이 리스크를 줄일 방법을 찾아내는 역할이 중요하죠"

오랫동안 기업 고객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만큼 처신도 중요하다. 10년 넘게 고객과의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정말 세상좁구나 싶을 때도 있다.

"1994년인가 한 정유사와 딜하면서 굉장히 트러블도 있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 담당자와 친해지는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10년 넘게 지나서 JP모간체이스에 입사한 후 일을 하던 중에 그 담당자를 또 만나게 된거에요. 세상 좁구나. 잘해야겠다 생각했죠"

고객으로부터 신뢰받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RM의 가장 기본이자 필수 자격이기도 하다.

▲고객은 말을 안하기도 한다 = 그에게 협상 노하우를 묻자 고객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잘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오른쪽 가고 싶은 사람에게 계속 왼쪽에 대해서만 설명하면 시간 낭비에요. 어떤 고객은 아예 오른쪽으로 가고싶다고 이야기 안하기도 하는데 그런 부분을 잘 찾아야 합니다"

세심하게 관심을 갖고 신뢰감을 줘야 한다. 특히 신뢰감을 쌓기 위해 중요한 것은 거래가 잘 성사되지 않았을 때의 대처다.

"잘 안되는 경우에는 왜 못하는지 설명드리고 클라이언트가 싫거나 소홀히 하는게 아니라는 걸 이해시켜 줘야 해요. 그 한번의 거래가 끝이 아니라 세월을 두고 그 기업과 함께 가는 것이니까요"

▲글로벌 기업금융, 확대될 것 = JP모간체이스은행은 2009년 12월에 글로벌 기업금융부를 새로 재정비했다.

아시아 이머징마켓, 라틴아메리카, 중동 등 각지에 지점을 여는 것도 향후 업무 확대를 위한 포석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이 글로벌화되면서 본점이 있는 곳보다 다른 지역에서 수익을 낼 기회가 많아졌어요. 차츰 국제시장에서 발자국을 넓혀가야 할 거에요"

그만큼 기업 고객을 대할 때도 접근 방식이 달라야 한다. 글로벌 마켓을 위주로 할지, 로컬 쪽으로 할지 잘 살펴야 한다.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 어딘지도 잘 알아야한다.

특히 요즘은 깐깐한 고객들이 많아졌다. 과거에는 인간적 친밀감 만으로도 통했다면 요즘에는 고객이 원하는 바를 잘 읽고 충족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고객들은 조건을 꼼꼼히 따져보고 거래해요. 한국기업들도 글로벌화 돼있어서 국내보다는 글로벌 마켓에 포커싱 돼 있죠. 다른 마켓에 대한 활발한 정보도 나눌 수 있어야 해요"

그만큼 고객의 요구도 다양해졌다. 자금관리, 상품, 외환관리, 투자은행 업무까지 아우르며 일해야 한다. 상품별 장단점과 마켓 동향 등을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컨퍼런스콜도 자주 하는 편이다.

"기업이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각 부서의 전문가들이 모여 팀으로 일합니다. 개별팀이 1대 1로 접촉하지 않아도 되게끔 RM이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거죠"

▲막막했던 '육아' = 조 상무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 힘들었던 일은 육아였다. 마케팅 업무의 특성상 업무 시간 외에도 주말 골프 등 약속이 많은데 절대적으로 아이에게 쏟을 시간은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최대한 신경을 쓰려고 해도 아이를 키우는 일에 쏟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었다. 아이에게 늘 "일하는 엄마를 둔 너의 운명이다"라고 쿨하게 말하지만 엄마로서 마음도 아프고 걱정도 됐다.

"아이 때문에 선생님께 전화올 때가 제일 무섭죠. 토요일에 부랴부랴 학교를 찾아뵙고 하다보면 그만 둬야 하나 생각할 때도 많았어요"

엄마가 옆에 없어 아이가 방황하나 싶어 한 때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했던 조 상무. 아이에게 엄마 일 그만둘까 묻자 일언지하에 'No'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느새 엄마의 일을 인정하며 자라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일해 온 건 어쩌면 가정의 서포트를 크게 받은 셈이죠. 엄마가 얼굴 얼마 안봐도 잔소리하는데 매일 옆에 있으면 더 할까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때를 떠올리며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조 상무의 표정에서 아이에 대한 기특한 마음이 묻어난다. 그는 육아에 대한 사회적 코스트나 인프라가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가장 기본은 '에티튜드' = 금융인을 꿈꾸는 여성 후배들에게 조 상무는 '에티튜트(태도)'를 강조했다.

"직장에서는 에티튜드가 제일 중요해요. 같이 일해보면 같이 일하고싶은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소홀히 해선 안된다고 그는 말했다. "이 일은 제일이 아닌데요"라는 말은 가급적 꺼내지 말아야 한다.

"자신에게 왜 이 일을 시켰는지 잘 생각해봐야 해요. 네 일, 내 일 구분하기보다 협조를 잘 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좋은 기회가 많이 생길 겁니다"

조승희 상무는 지난 1988년 뱅크오브보스턴으로 입행한 후 DBS, 아랍뱅크, 씨티은행을 거쳐 현재 JP모간체이스은행 서울지점 글로벌 기업금융부에서 다국적기업 RM을 담당하고 있다.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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