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지금이 어느 때인 데 신규 투자 타령이냐. 과감한 회사는 호황 때 가장 크게 벌지 모르지만, 불황 때는 가장 빨리 크게 망한다. 정신 바짝 차려"

연말에 간판 A 대기업 사장은 오너 회장님에게 새 기업인수.합병(M&A) 투자 건을 보고하러 갔다가 아침부터 된통 깨졌다.

회장님은 70년대 석유파동과 80년대 올림픽 붐, 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국제금융위기 등 지난 30년 굽이굽이 생사의 갈림길과 변곡점을 경험한 탓에 현재 시점을 '쉽게 일어나고 함부로 움직이다'(輕擧妄動) 가는 큰일 날 때로 보고 있다.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비용절감 환경에서 기업 키우려다 오히려 쪽박 찰 수 있으니 내실 다지라는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기업들이 '현금이 최고'라는 인식으로 투자와 연구개발을 줄이고 몸을 잔뜩 사리고 있다.

올 3분기 말 상장법인들의 현금과 현금성 자산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8.4%나 늘었다. 기업이 설비투자나 연구개발에 돈을 쓰지 않고 대신 현금 보유량을 늘렸다는 것은 그만큼 앞이 안 보인다는 얘기다.

대표 간판기업인 삼성전자의 3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3조6천958억원, 작년 말과 비교해 2배가량 급증했다. 반면 이 회사의 3분기 시설투자는 10분기만에 최소 수준으로 축소됐다. 투자심리 위축은 사내 유보금 증가로 이어졌다.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배당금마저 아껴 현금으로 쌓았다.

이 모든 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겪었던 혹독한 학습효과 때문이다.

신규투자가 줄면 당연히 국내 경제 회복 속도는 더뎌진다. 하지만 기업들만 나무랄 수만은 없다. 망하면 누구도 거들떠봐 주지 않는 데 기업입장에서는 선거 결과에 따라 경제정책이 바뀌는 상황에서 냉정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불투명성이 걷히기 전까지 투자 계획과 규모를 줄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의 '전략경영', '비상경영'이라는 구호는 달리 말하면 칼바람이 불면 현찰확보 한 채 쥐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기업의 보이지 않는(invisible hand) 이기적 행동은 설비투자 위축과 고용 축소로 직결돼 사회적 목표나 가치와 충돌한다. 따라서 어느 대선 후보가 당선되든 간에 선거 직후 새 정부는 가장 이른 시일 안에 '정책적 불투명성'을 걷어내고 기업의 투자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돈은 가장 겁이 많은 '동물'이다. 정치·사회적 불투명성이라는 두려움의 바이러스가 창궐할수록 돈이라는 짐승은 바짝 졸아, 은행으로 개인 금고로, 심지어 땅속으로 꼭꼭 숨는다.

재임한 버락 오바마 美 대통령과 새로 취임한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각자 경기를 진작시킬 것으로 보이는 시점에서, 한국의 차기 정부도 기업들이 쌓아놓은 '아이들 머니'(idle money)를 어떻게 투자라는 햇볕 아래로 불러낼 것인지 온갖 지혜를 다 모아야 할 것 같다.

(취재본부장/이사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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