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신은실 기자 = `최연소 리서치센터장', `퀀트 1세대', `최장수 센터장', `계량 분석의 선두주자'….

조익재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에겐 별명이 많다.

한 때 `호랑이 센터장'으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던 그는 그 누구보다 리서치센터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탄탄한 기본기에서 실력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으로 후배들을 엄격히 교육하면서 여러 가지 별명도 얻었지만 그만큼 후배 애널리스트들이 `실력'으로 인정받고 승부하길 바랐다.

그가 최근 "베스트 애널리스트 타령으로 여의도 퀄리티가 10년은 후퇴한 것 같다"고 일침을 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4일 조 센터장은 연합인포맥스와의 인터뷰에서 "리서치가 조금 더 발전하고 좋은 방향으로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했던 말이 이렇게 파장이 커질 줄 몰랐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경영학사와 재무관리 석사를 졸업하고 대우경제연구소에서 증권업계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대우증권 리서치를 거쳐 메리츠증권 리서치팀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최연소' 타이틀과 함께 리서치를 이끌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CJ투자증권에 몸담았고, 하이투자증권으로 회사 주인이 바뀌는 와중에도 센터장 자리를 지켰다. 장장 10년 이상 리서치 `수장' 자리를 지켜오며 지난해 말에는 현실적으로 센터장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급인 전무 자리까지 올랐다.

조 센터장은 "우리나라 퀀트 분석의 선두였던 대우경제연구소에서 리서치를 시작해 퀀트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연소 센터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퀀트가 중요해지기 시작한 시류와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당시 누가 봐도 최고의 리서치였던 대우증권을 6개월 만에 뛰쳐나오며 그는 `자신만의 리서치'를 구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데이터, 모델, 인사이트'라는 모토를 처음 만든 것도 이때다.

때론 "내 딸이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며 후배들을 다그치기도 했지만, 술자리에선 "센터장님 딸이 천재 맞죠?"라는 농담을 서슴없이 받아 주는 따뜻한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교육한 후배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할 때가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하다"며 "연봉이 5~6배 오르는 것은 물론 지금 각 증권사 리서치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조 센터장은 그러나 최근 `인기투표'에 가까워진 베스트 애널리스트 선정 문제나 `셀(sell)'을 외치지 못하는 리서치 분위기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나 또한 2007년부터 4년 연속 베스트 애널리스트였고, 그 수혜를 받은 것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애널리스트에게 `인기'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주가를 연구하고 예측하고 책임을 지는 기본자세"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그가 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메리츠증권 시절 `마켓아웃룩'이라는 보고서를 쓰고서부터다.

오른쪽 페이지엔 그림, 왼쪽 페이지엔 글을 담은 20장 남짓한 논리 정연한 페이퍼가 매니저 등 시장 플레이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당시에도 글을 절대로 길게 쓰지 않았다"며 "길게 쓴다는 것은 그만큼 이슈에 대해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고, 글에는 꼭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기업이나 투자자들도 애널리스트가 내는 `투자의견'에 좀 더 신뢰를 가지고 관대해졌으면 한다는 것이 조 센터장의 바람이다.

그는 "일부 기업들은 `셀'을 부르는 애널리스트에게 기업탐방을 받아주지 않고, 투자자들도 자신이 가진 종목에 `셀'을 부르면 항의가 온종일 들어온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서는 애널리스트들이 도저히 소신 있는 의견을 낼 수 없을뿐더러 위축이 될 수밖에 없다"며 "정확한 분석을 해놓고도 말을 안 하거나 왜곡하려고 든다"며 안타까워했다.

조 센터장은 대한민국 주식시장에 두 번의 혁명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제는 `셀'을 부를 수 있는 `제3의 혁명'이 필요할 때라고 판단했다.

첫 번째 혁명은 1990년대 초반 외국인 투자자에게 시장을 개방했을 때다. 당시 외국인이 주가수익비율(PER)이 낮은 주식을 싹쓸이하며 주가가 크게 올랐다. 이때부터 밸류에이션이 시장 예측의 중요한 잣대로 등장했고, 보다 과학적 분석이 가능하게 됐다.

두 번째 혁명은 1999년 증권사에서 `리서치 키우기 열풍'이 불었을 때다. 그 해애널리스트 스카우트 열풍이 처음 시작됐다. 여름에는 연봉이 연초보다 무려 3배가 뛰어올랐다. 국내 리서치가 팽창하면서 주식시장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 센터장은 "이제 리서치에서 `셀'을 부를 수 있는 3차 혁명이 와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더 이상 주가는 왜곡되지 말아야 한다"며 "주가 예측이 위로만 열려 있고, 아래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조 센터장은 `최장수 센터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앞으로도 계속 실전에서 애널리스트로서 의견을 개진해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예전보다 자산시장 변동성이 심해졌고, 기대 수익률은 낮고 리스크는 커지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어려운 상황일수록 전문가들이 가이던스를 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증권가 리서치가 더욱 성숙하면서 `데이터'와 `모델'이라는 기본적인 무기를 바탕으로 미래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인사이트'를 갖춘 후배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남겼다.

essh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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