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3년 전 결정한 회사채 발행을 요즘 와서 이토록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업을 해오면서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지만, 요즘처럼 잠이 오질 않는 때도 없다.

중견 그룹의 오너 입장에서 당시 그룹 재무담당자들이 회사채발행을 적극적으로 권유했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 담당자들은 내게 이렇게 부추겼다. 회장님,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일본의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서 돈이 안전자산인 국채로만 돈이 몰려, 신용도 높은 기업 회사채 수익률까지 덩달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A급 회사채는 '오버 부킹'되고 투기등급까지 '사자'가 나오는 지금이 우리 그룹이 회사채를 발행할 적기입니다.

그때 대형증권사 사장과 IB 본부장은 결심을 못 하는 나를 찾아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은행장에게 가서 굽실거릴 필요도 없습니다. 발행 물량이 많아도 기관투자가의 선호가 높아 소화에 문제없습니다. 편의성 면에 은행 대출보다 쉽고 신경 쓰실 건 채권시장과 소통만 잘하면 됩니다.

내가 저금리 기조를 활용해 자금을 조달해 고금리로 빌린 은행 대출금을 갚는 전략을 펼치기로 결정하자, 당시 언론은 우리 그룹이 과감하고 적극적인 재무전략을 펼친다는 칭찬도 했다.

이런 우리의 앞선 결정은 주변의 다른 중견 기업을 자극해 회사채 발행을 부추겼다. 연합인포맥스가 지난 1월에 발표한 2012년 자본시장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기업들은 작년에도 구조조정과 위기 시를 대비하기 위해 채권 발행이 유행했다. IPO나 유상증자, M&A 시장은 얼어붙었지만, 회사채 발행 시장은 상대적으로 활기를 띠어 국내 10대 그룹의 계열사들이 발행한 회사채 규모가 24조 원을 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의 회사채 발행이 급증했던 2009년의 21조 원에 비래 13.5%가 급증한 것이다.

하지만, 올해부터 금융시장 여건이 악화된 가운데 한꺼번에 만기가 몰리자 대형 건설사를 비롯한 우리 같은 중견 그룹은 죽고 사는 상황에 내몰렸다.

은행차입은 절차가 까다롭지만 거래해온 연륜과 오랜 관계에 기반을 둔 이력을 참작한 기다려주는 인간미와 허용치가 있었지만 회사채시장은 완전히 달랐다. 투자가들의 만기시 계약사항 준수 요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기계의 세계였다. 만기 시점에 채권시장 분위기가 얼어붙으면, 위험은 미뤄지면서 더 증폭되고 기업은 곧바로 유동성 위기로 내몰렸다. 발행은 손쉽지만 만기시에는 기업의 부채관리와 영업 여건 변화에 대해 금융시장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지 않았다. 곧장 저승사자로 돌변해 기업의 숨통을 끊어 놓는 비정한 곳이다.

우리 같은 기업 입장에서는 불투명한 글로벌 경기상황과 대내외 금융시장 변동성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다. 신용평가사의 등급 하향 조정이 공격적인가 보수적인 시기인가에 따라서도 상황은 달라진다. 최근 회사채발행 수요조사에 참가한 증권사들이 요즘 시장의 붐 앤 버스트(Boom & Burst) 사이클을 잘못 예측해 미매각된 회사채를 끌어안고 끙끙거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예견하고 준비하지 못한 내 탓이 크다. 당장 먹기 편해 보여 내렸던 3년 전의 재무적 선택은 치명적인 독배를 들이킨 일이었다."

(취재본부장/이사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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