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장용욱 기자 = 지난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이건희 회장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시내에 있는 한 유통매장이었다.

그곳에서 이 회장은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는 삼성전자 제품을 보고는 바로 사장단을 호출한다. 소니 등 당시 일류 업체의 가전제품과 삼성전자의 제품을 즉석에서 비교하도록 한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바로 이 회장은 현장에서 그룹 수뇌부에 "2등 정신을 버려라"고 강하게 질타했고, 이는 그해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포로 이어졌다.

또, 그때 처음으로 실시된 비교전시회는 이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정례화돼 '신경영'의 상징으로 이어져 왔다.

1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이 회장이 20년 만에 전시회의 이름과 방식, 성격 등을 바꾸기로 한 것은 신경영의 결과물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분석된다.

◇ 삼성의 '빠른 추격자'로 만들어 준 비교전시회 = 지금까지는 이 전시회는 앞선 기술의 제품을 보면서 삼성전자 제품을 반성한다는 의미가 컸다.

실제로 이 회장은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삼성전자 제품의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꼬집어 내며 지적했다.

가령 제품을 완전히 분해해 볼트 수까지 서로 비교하게 한 후 삼성전자 제품에는 왜 볼트가 많으냐고 질타하는 식이었다.

경쟁사 제품보다 현저하게 잦은 고장 비율을 가리키며 "소비자가 이렇게 고장이 잦은 제품을 사고 싶겠느냐"고 지적하며 '품질경영'을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

전시회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해당 제품을 담당하는 임직원에게는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를 통해 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긴장감도 불어 넣었다.

또, 이 회장은 전시회에서 경쟁사 제품을 보며 새로운 혁신을 직접 주문하기도 했다.

실제로 TV 브라운관을 평면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보라는 이 회장의 특명은 '평면 TV' 개발로 이어졌고, 디자인을 강조한 이 회장은 주문은 와인잔을 형상화한 '보르도 TV' 탄생을 가능케 했다.

또, 이 회장은 재작년 열린 전시회에서는 "경쟁사보다 앞선 제품을 만들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며 소프트기술과 S급 인재, 특허를 확보하라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이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석해 제품을 꼼꼼히 둘러보고 있다>

◇ '선진'이란 말 빠진 전시회, 1등 자신감의 표현 = 이제 전시회의 이름에서 '선진제품' 부분을 '경쟁제품'으로 바꾸기로 한 것은, 더는 타사의 제품을 '앞선 제품'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미 1등이 된 삼성전자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이미 TV와 휴대전화(스마트폰)를 비롯해 반도체D램과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디스플레이구동칩(DDI), 칩카드, 미디어플레이어용 집적회로(IC), LCD(액정표시장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LED(발광다이오드) 모니터 등 11개 제품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더는 타사의 제품에서 배울 점을 찾기보다는 자사 제품의 발전상을 되돌아 보며 또 다른 혁신의 밑거름을 삼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타사 제품과의 비교를 통해 항상 위기의식을 잊지는 않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결국, 그동안의 전시회가 '1등 도약'을 위한 것이었다며 이제는 '1등 수성'을 위한 계기로 바뀌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전시회 개편은 그동안 '빠른 추격자' 전략을 추구하던 삼성이 1위에 오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시장 선도자' 전략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yuj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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