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대기업 구조조정은 속도전이라는 말이 있다.

대기업의 특수성 때문에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큰 만큼 부정적 심리 효과를 차단해 고용과 실물경제, 금융시장에 주는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박근혜 정부의 첫 대기업 구조조정의 시험대로 STX그룹이 떠올랐다.

조선과 해운을 근간으로 하는 대기업 그룹이어서 일자리와 지역경제,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만만찮다.

정부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정부 주도로 이번 구조조정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물론 정부의 일관된 '지침'과 '방향'은 STX그룹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추진력있게 밀고 나가야 할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의사결정은 더디기만 하다.

채권 은행들의 동의와 협의를 통한 자율협약이라는 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속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산은의 리더십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들도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이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산은 내부에서조차 "회장이 빨리 의사결정을 내려주지 않으니 답답하다"는 말도 나온다.

홍 회장은 최근 임직원들에 STX그룹 처리와 관련한 불만과 고충을 털어놓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

'전 정부에서 뭐 하다가 이렇게까지 만들어 놨느냐', 'STX그룹 살려주려다 우리가 망하게 생겼는데 그걸 나보고 다 책임지란 말이냐'는 등의 말들을 공식,비공식 석상에서 쏟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보전해주고 담당 임직원들을 면책해 달라고 홍 회장이 최근 정부에 요청한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불만과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STX그룹의 위험신호는 지난 수년전부터 계속 있어 왔다.

지금와서야 난리법석을 떠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것은 어찌보면 산은의 '자업자득'이다. 산은 민영화 이슈에 매몰돼 정작 집중해야 했던 부실 기업의 위험신호 관리에 소홀했던 탓이다.

하지만 국내 최대의 국책은행을 책임지고, 주채권은행의 수장인 홍 회장이 과거의 잘못을 탓하고 있기엔 상황이 심각하다.

진해와 창원 지역의 STX그룹 협력사들은 자금난이 심각하다며 아우성이고,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수많은 눈들은 산은만을 쳐다보고 있다.

홍 회장은 취임사에서 "당장의 수익성 보다는 국가경제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혁신적이고 헌신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기업구조조정에서 적극적인 시장안전판 역할을 해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의 재도약을 지원해 경제가 활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자"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정책금융기관의 맏형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는 포부를 밝혔다.

홍 회장의 말처럼 외환위기 이후 산은은 국책은행으로서, '맏형'으로서 국내 대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메카'로 자리잡아 왔다.

다수의 채권 은행들의 불만을 다독이고, 때로는 정부를 뒷배경 삼아 압박을 가하면서 속도감있게 구조조정을 추진해 많은 기업들을 살려냈다.

최근처럼 채권 은행들의 불만이 곳곳에서 터지고, 이를 수습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은 산은 입장에서는 불행이다.

과거처럼 '맏형'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국책은행으로서의 리더십을 하루빨리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홍기택 회장도 스스로 공언한 것처럼 '성공한 낙하산'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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