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장용욱 기자 =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하면 잘해봐야 1.5류다"고 우려했다. 삼성이 국내 1등에 안주에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할 것을 걱정한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그때 이 회장의 걱정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신경영 선언 후 이 회장이 지속적으로 혁신을 독려한 덕분에 삼성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커진 덩치에 걸맞은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경우가 생기면서, 일부 우려의 시각도 남아있다.

◇ 지속적인 '혁신 채찍질' = 삼성에 대한 이 회장의 독설은 신경영 선언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신경영 정신이 퍼지면서 혁신이 이뤄지는 와중에도 그는 또다시 채찍을 가하며 혁신을 독려했다.

실제로 지난 2002년,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고 있었음에도 이 회장은 "5년에서 10년 후 무엇을 먹고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며 조직에 또다시 위기감을 불어넣었다.

2005년에는 이탈리아 밀라노로 다시 주요 사장들을 소집해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짧은 순간에 고객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삼성 제품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칭찬보다 채찍을 가한 것이다.

또, 2010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선전했음에도 "지금이 진짜 위기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다시 긴장감을 심어줬다.

◇ 20년간 '13배' 성장…'소니·노키아' 넘어서다 = 이처럼 혁신에 대한 이 회장의 끈질긴 주문 덕분에 삼성은 신경영 선언 후 20년 동안 눈부시게 성장했다.

1993년 당시 29조원이었던 그룹 전체 매출액은 지난해 380조원으로 13배로 늘었고, 같은 기간 8천억원에 불과했던 세전이익도 39조1천억원으로 49배 급증했다.

수출 규모도 107억달러에서 1천572억달러로 15배 증가했고, 특히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실적을 연이어 경신하며 작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200조원 매출-20조원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그러는 사이 삼성의 임직원 수도 14만명에서 42만명으로 늘었고, 그룹의 시가총액도 7조6천억원에서 338조원으로 44배나 급등했다. 그 결과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작년에 사상 처음으로 세계 9위(브랜드컨설팅그룹 인터브랜드 기준)로 올라섰다.

그 결과 신경영 선언 직전 D램 반도체 정도에서만 세계 1위였던 삼성이 이제는 D램을 비롯해 TV, 휴대전화(스마트폰),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디스플레이구동칩(DDI), 칩카드, 미디어플레이어용 집적회로(IC), LCD(액정표시장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LED(발광다이오드) 모니터, 리튬이온 2차전지 등 20개 가까운 제품군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게 됐다.

특히 TV 시장에서는 영원할 것 같던 소니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7년째 1위를 지키고 있고, 후발주자였던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잡스의 애플을 단숨에 이겼다. 또, 휴대전화 전체 시장에서도 14년간 1등을 놓치지 않던 노키아를 작년에 드디어 넘어섰다.

◇ '인재'를 아끼는 사회분위기도 전파 =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학력을 가지고 불이익을 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도록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대우해주면 된다"('이건희 에세이'中)

이런 이 회장의 '인재관'은 신경영 선언 후 바로 삼성 채용과정에 접목됐다. 삼성은 1995년 신입사원 공채부터 학력제한 등을 철폐하는 '열린 채용'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또, 핵심인력을 'S(Super)', 'A(Ace)', 'H(High potential)'급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해 학력과 배경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실험은 20년이 지난 지금 완전히 자리를 잡아 현재 삼성전자의 대표이상 3명 중 2명은 소위 'SKY' 대학 출신이 아니다. 이 외에도 30대 부장, 여자 부사장 등이 나오면서 '삼성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출세한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 '성공 신화'에 일부 오점도 = 하지만 신경영 선언 후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주변의 거센 반대에도 닛산과 기술제휴를 통해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지만, 5년 만에 정리해야 했다. 그동안 이어져 온 '삼성 불패신화'에 오점을 남긴 것이다.

또, 여러 내부 문제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2005년 일명 'X파일' 사건을 통해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두루 관리했다는 의혹의 제기돼 일부에서는 삼성이 사회 전반에 과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그런 우려는 2007년 그룹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가 이 회장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면서 확대됐다. 결국 이 회장은 특검에 의해 조세포탈에 대한 유죄가 인정됐고, 경영일선에서 2년여간 물러나야 했다.

이어 작년에는 이 회장이 친형인 이맹희 씨와 유산을 놓고 다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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