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억 칼럼> 늙어가는 오너의 고독
<최기억 칼럼> 늙어가는 오너의 고독
  • 승인 2012.02.1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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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겨울 날씨가 청양 고추처럼 맵지만 회장님은 그룹 사옥으로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젖는다. 그의 독백을 들어본다.

# 최근에 보수ㆍ진보 양쪽 모두 경쟁적으로 나를 탐욕스럽다고 공격한다. 이 땅에서 불철주야, 사업보국(事業報國)만을 해온 내게는 이런 상황이 사실 조금 쇼크다. 내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외롭기까지 하다. 이런 상황에서 측근들은 내게 이렇게 위로한다. '앞으로 어떤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큰 걱정 없습니다. 회장님께서 새로운 인맥을 장악하는 데는 1년이면 충분하니까요. 학자, 언론인, 고위관료, 정치가들은 회장님을 알현하기 위해 '학춤'을 추고, 회장님과 더 가깝다는 자랑을 하느라 자기들끼리 시기질투합니다.' 하지만 측근들의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표(票)를 위해서는 영혼도 파는 가장 탐욕스런 자들이 최근에는 일치단결해 나를 비난하면서 다음 선거에서 최대 쟁점으로 앞세울 모양이다.

# 다른 비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3대 세습과 관련해서 나도 할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유교문화에서 상속을 아들에게 하지 않고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이는 나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만이 아니다. 재벌도 시대를 초월하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화의 산물인 한 존재일 뿐이라 점을 말해두고 싶다.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싶어도 아들 딸이 30세 성년이 되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식 부모 간에도 돈이 개입되면 무서워진다. 아들ㆍ딸ㆍ마누라와 일가 피붙이들에게 냉정하게 이해관계를 교통정리 하는 일은 기업 경영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바쁜 일에 쫓기고 시간만 보내다가 시점을 놓치고 나이 든 아들과 딸에게 모든 걸 상속해주는 쪽으로 떠밀려간다.

# 내가 수성(守城)해 지금은 세계적인 덩치로 키운 이 그룹은 언제나 권력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커진 덩치 만큼이나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교차하는 거대한 투쟁의 장이다. 늙어가는 오너로서 이 점은 항상 고민거리다. 계열사간 부하들간의 이해관계, 머리가 굵어진 자식들을 둘러싼 암투를 조율해 그룹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른다. 노년에도 내가 편할 수 없는 이유다. 특히 후계구도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대·내외적으로 온갖 구설에 휘말릴 각오도 해야 한다. 오늘날 나의 또다른 고민은 아들이라고 마구 사업을 물려줄 수도 없는 점이다. 모든 업(業)이 전문화ㆍ고도화되면서 상속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능력이 되고 있다. 선대에서 창업한 그룹을 아들과 손자 대에서 말아 먹는다면 내게는 가장 큰 공포다.

# '왜 돈을 버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말한다. 일차적으로 나와 내 가족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라고. 재벌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에서 이기심을 탓해서는 안 된다. 시장의 기본 원리인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은 이기심에 기초한다. 물론 이것이 통제되지 않고 끝없는 탐욕으로 치달으면 체제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돈벌이에 나선 사람치고 공익과 공동체를 내 가족에 우선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최근 나온 비판 중에서 법인재산이 아닌 나 개인 재산을 기부하지 않는다는 지적은 가장 아프다. 한국에서 재벌은 외부의 압박과 비판에 수동적으로 변하기보다는 내적 자각에 의한 능동적 진화가 필요하다는 데 조금씩 공감해 가고 있다. 한국에서 재벌로 살아가려면 스스로 자본주의 4.0에 적응하지 않으면 무슨 곤란한 상황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취재본부장)

tscho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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