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흥국이 외환위기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의 가계(家計)를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는 가계가 한국 경제의 약한 연계 고리로 금리와 환율 등 거시금융 환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월대비 하락세를 보이는 가운데 가계부채의 증가세까지 가팔라진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가는 내리는 데 가계부채가 늘어나면 일본식 불황인 부채디플레이션이 촉발될 수 있다.

부채 디플레이션은 가계가 과도한 채무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소비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경기침체와 물가 하락이 장기간 지속되는 경제 현상을 일컫는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가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도입한 개념이다.

부채디플레이션은 가계부채의 증가가 소비지출 감소로 이어지고 주택 등 자산 가치와 물가 하락이 수반돼 악순환의 고리가 완성되는 경제 현상이다. 주택 등 자산가치 하락은 가계의 디레버리징 촉발로 더 가팔라지게 된다. 1990년 이후 일본식 불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일본은 부채 디플레이션이 촉발되면서 시중금리 제로금리 시대를 맞는 등 본격적인 저금리 시대로 돌입했다.

한국도 최근 가계발 각종 경제지표에서 부채 디플레이션의 전조가 포착되고 있어 당분간 금리가 크게 오르기 힘들 것으로 점쳐진다. 디플레이션이 아니더라도 가계의 이자 부담이 워낙 커진 탓이다. 가처분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올해 1분기 가계신용 기준으로 136.3%, 자금순환표상 기준으로 163.8%를 기록했다. 일본과 미국 등이 본격적인 디레버리징에 나선 시기가 가처분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50% 안팎 수준일 때였다. 한국도 가계가 디레버리징에 나설 임계치가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서울 채권시장과 외환시장 등도 한국의 가계가 블랙홀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너무 가파른 가계 부채 증가= 한국은행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2.4분기 현재 가계부채는 980조원에 달했다. 한국은행은 가계부채가 1분기말 963조1천억원에서 16조9천억원이 늘었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위해 취득세 감면과 영구 인하 등을 추진한 데 따라 주택대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가계부채 증가세를 주도했다.

예금은행의 대출 잔액 증가분 8조3천억원 가운데 주택담보 대출 증가분이 5조6천억원이다. 저축은행 등 비은행의 대출잔액은 3조1천억원 늘었는데 이 가운데 마이너스 통장 등 생계형대출(기타대출)의 증가분이 2조8천억원이다. 판매신용은 2분기 6천억원 감소한 53조3천억원으로 나타났다.

일부 여유가 있는 계층은 집사는 데 대출을 대거 일으키고 저소득층 등은 비은행권에서 생활형편자금 등 급전을 마이너스 대출 형태로 빌린 셈이다. 특히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카드 사용액을 의미하는 판매신용이 6천억원이나줄어든 대목이 눈길을 끈다.

▲가계 소비지출 4분기 연속 감소…악순환 이제 시작= 지난 2.4분기 가구당 실질소비지출이 4분기 연속 감소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은 '2.4분기 가계동향'에서 지난 분기 가구당 실질소비지출이 전년 동기 대비 0.4%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3분기 0.7% 감소를 기록한 이후 4분기 연속 감소세다. 지난 1년간 가계는 실질 소비를 줄이는 등 내핍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가구당 실질소득은 지난해 2분기에 비해 1.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구당 처분가능소득은 328만7천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 늘었다. 소득이 늘어나는 데 비해 소비를 더 큰 폭으로 줄인 덕분이다. 이른바 불황형 흑자가 가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셈이다.

디플레이션의 전조 가운데 하나인 소비 위축의 그늘이 가계에 짙게 드리운 정황은 다른 지표에서도 포착됐다.

평균소비성향이 73.1%로 지난해 2분기보다 1.0%p 감소한 점도 눈여겨 봐야한다. 평균소비성향은 지난 2011년 1분기 이후 9분기 연속 전년동기비 감소세를 나타냈다.가계가 이제 실질 소득이 늘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소비를 본격적으로 줄이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 9개월 연속 1% 물가 상승의 의미= 소비자 물가가 9개월 연속 1%대의 상승세를 보인 결정적인 원인도 가계발 소비 부진으로 지목되고 있다. 가계의 부진한 소비가 총수요 부족으로 이어진 탓이다. 통계청은 이달초 소비자물가가 전년동기대비 1.4%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6월의 1.0%보다 상승률이 0.4%포인트 올랐지만 소비자물가는 올해 들어 2월 1.4%, 3월, 1.3%, 4월 1.2%, 5월 1.0% 등 1%대의 상승세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한국은행의 중기물가목표치(2.5~3.5%)에도 못 미치는 낮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디플레이션의 전조가 될 수도 있다.

해외투자은행(IB)들도 올해 한국의 소비자물가 전망치를 일제히 하향 조정하는 등 한국의 가계발 총수요 부진을 예고했다.

JP모건체이스는 연간 소비자물가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1.6%로 0.5%p 인하했고, 노무라도 2.3%에서 1.5%로 0.8%p나 하향 조정했다. 스탠다드차타드(SC)는 올해 한국의 소비자물가가 전년대비로 1.8%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정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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