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권용욱 기자 =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20일 단행한 부총재를 비롯한 임원급 집행간부와 국.실장급 내정 인사 결과에 한은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다. 이번 인사의 직.간접적인 피해를 겪게 된 직원들뿐 아니라 일반 행원들까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단순히 인사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물가 당국으로서 한은의 자긍심에 심한 상처를 남겼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일부 직원들은 고대 중국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나라를 망하게 한 데 따른 회한을 삼촌인 기자(箕子)가 시로 읊었다는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는 사자성어까지 동원해 한은 직원들의 충격을 설명했다. 조국이 망한 것을 한탄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한은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의 충격이라는 설명이다.

한은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이 포착된다. 한은의 첫 번째 소임인 물가도 잡지 못하는 김 총재가 과감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한은의 미래 동량까지 잘라냈다는 평가다.

모 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김 총재가 조직개편에서 보여준 과단성을 통화정책에서 보여줬으면 현재의 국내 경제 상황에서 한은이 가질 수 있는 정책 수단이 훨씬 풍성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직원은 "이번 인사에서 밀려난 금융시장국장과 조사국장은 총재 취임 이후 조직을 떠나간 전 국제국장과 정책기획국장과 함께 소위 '4대 천왕'으로 불리던 이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특정 수장에게 잘 보여 이 같은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라, 수십년간 한은을 위해 탁월한 전문성과 업무수행 능력을 보여왔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나름의 한은맨으로서 자존심을 갖고 독립적인 통화정책과 물가안정 등을 위해 부단히 노렸했던 사람들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러나 김 총재는 기존의 승진구도, 즉 '순혈주의'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모두 일선에서 물러나게 했다"며 "순혈주의란 개인 역량의 외적인 부분들로 조직의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이며, 이번 인사는 김 총재만의 순혈주의를 심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도 된다"고 지적했다.

다른 직원은 "이번 인사에서 한.두명의 파격 인사는 예상했지만, 한.두명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모든 부분이 파격이다. 한은이 사기업처럼 오너의 눈에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조직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운데 사기업과 달리 한은 총재의 경우 임기가 정해져 있어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한은의 또 다른 직원은 "이번 인사가 너무 총재 중심적으로 이뤄진 데 따른 우려가 있지만, 젊은 인사들이 윗선에 배치되는 만큼 긍정적인 요소들도 기대하고 싶다"며 "실질적인 추진력보다는 업무 형식에만 치우치던 다소 관료적인 행태들이 이번 인사를 계기로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언급했다.

김 총재는 자신의 한정된 임기 기간을 고려, 급격한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소프트 랜딩'식의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에 따라 나타나고 있는 각종 부작용을 치유하는 것도 총재의 몫이 됐다. 단순히 젊고, 해외 주요 대학의 박사 학위를 가지고, 국제적 업무경험이 풍부해야 한다는 데서 벗어나 더욱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인사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은 내부에서 총재 자신은 물론 외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정통 한은맨의 'DNA'라면 한은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손꼽힌다. 김 총재가 이런 한은맨들의 DNA를 뽑아내고 한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오해를 벗어나려면 중앙은행의 본분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ywk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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