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온갖 꽃망울이 한반도 전역에서 폭죽같이 펑펑 터지고 있지만, 대기업의 투자는 아직도 한겨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30대 그룹은 작년에도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환경을 핑계로 투자는 꺼리고 천문학적 현금 사재기에만 몰두했다. 이들의 예금과 단기금융상품, 예치금 등 현금성 자산이 작년 한 해 18%가 늘어 무려 157조7천억원, 국가 예산의 절반에 이르렀다. 이중 삼성그룹이 60조원으로 전년(42조8천억원)보다 40% 늘었고, 현대·기아차그룹은 전년보다 14.2% 늘어난 39조5천억원의 현금성 자산을 비축했다.

이들 대기업 재무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분위기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보유 현금을 헐어 큰 투자에 나설 계획이 전혀 없고, 앞으로 더 현금을 쌓을 내부방침이라는 전언이다.

대기업들이 이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다.

첫째는 만연한 경제민주화, 반기업 정서로 인한 오너들의 사기 저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옥살이'하고, 이를 운 좋게 피한 일부 오너도 자숙을 핑계로 큰 투자 의사결정은 미루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소한 일일지 모르지만, 오너들 입장에서는 작년 11월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라 연봉 5억원 이상의 등기임원 보수가 의무적으로 공개되는 사안 등은 예민한 일이다. 일부 사주들은 등기 이사직을 내려놓는 등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국의 대기업의 속성상 대규모 신규투자를 지휘하고, 해외 기업을 공격적으로 M&A 하는 프로젝트는 오너의 의욕과 의지, 재가가 필요한 사안이다. 이들이 정치 사회적 압박 때문에 '맛'이 간다면 '얼굴마담'인 경영 사장들이 큰 투자를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 번째는 핑계가 아니라 경영환경이 진짜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탓도 크다. 기업의 현금보유가 계속 증가하는 것은 거꾸로 불황의 강도가 그만큼 깊고 길며, 대외 불투명성도 예측이 더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이 지난 60년대 11% 이상을 구가했지만, 10년 주기로 차츰 줄어 2010년대에는 5% 수준으로 낮아졌고, 문제는 앞으로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경영 사장들이 대규모 신규 투자건 보고를 올리면 오너들은 '한방에 훅 가고 싶으면 경거망동하라','외환위기, 금융위기, 장사 하루 이틀 하느냐','기다려라. 서두를 것 없다'고 야단쳐 돌려보낸다.

오너들은 중국과 일본 대기업의 해외 지분투자와 M&A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국내 대기업이 현금만 쌓아놓고 지난 5년 동안 허송세월했다는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바둑의 격언처럼 '아생연후(我生然後)에 살타(殺他)'라는 주문만 외우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의 현금 축적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국가 경제 전체를 놓고 보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과 정부는 빚에 허덕이는데 대기업만 현금을 독식했다는 얘기이고, 이는 가계와 정부의 부가 완전히 기업에로만 이전됐다는 의미다. 기업 재무구조는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성장도 침체의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다. 당연히 일자리 창출은 난망이다. 투자활성화를 위해 규제 완화하고 세제혜택을 늘려 성장동력을 찾도록 해야 하는데 도무지 해법이 쉽지 않은 형국이다.

(취재본부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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