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03년 3월12일. 서울 채권시장은 당시 SK글로벌의 유동성 위기에 따른 MMF 환매 사태로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정작 시한폭탄은 따로 있다며 전전긍긍했다. 연체율이 10%를 넘어선 카드채가 투자적격 판정을 받고 MMF에 대거 편입돼 있었기 때문이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 이튿날 카드채가 대거 편입된 MMF에서 하루에만 23조원이 인출되는 환매사태가 벌어지며 국고채 3년물 기준으로 금리가 57bp나 오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나려던 한국경제를 또 한 번 수렁에 빠뜨린 이른바 '카드채 사태'는 이렇게 시작됐다.

카드채 사태는 경기 부양에 목말랐던 정부가 카드사의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행을 방관한 탓에 발생했다. 당시 카드사는 길거리에서 수입원도 없는 대학생 등을 상대로도 카드를 '묻지마'식으로 발행하는 등 몸집 불리기에 열중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카드사의 광고 카피가 유행할 정도로 당시 분위기는 과열됐다.

카드 사용액 증가 등에 따른 내수 경기 호전을 즐겼던 금융당국도 카드사의 무분별한 모집행위를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았다. 당시 경제부총리,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은 카드사의 연체율이 두자릿수에 육박했지만 카드사의 건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카드사의 연체율이 가파른 속도록 올라가자 당국이 동원한 대책은 카드사의 대표이사를 소집해 기자회견을 여는 게 다였다. 카드사 대표이사들은 당시 금융감독위원회(금융위원회의 전신)와 금융감독원 여의도 사옥에 불려와 연체율이 두자리숫자에 육박했지만 카드사의 건전성에 문제가 없다며 '관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신용평가사들이 연체율이 두자릿수에 육박한 카드사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하향 조정하면서 카드사 대표들의 호언은 식언이 됐다.

이후 카드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당시 업계 1위였던 LG카드사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고 카드사 전체가 연쇄적인 부실 위험에 직면하는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됐다.

11년 6개월 전 일을 굳이 되돌아 본 까닭은 최근 부동산 경기부양에 따른 가계부채 증가가 카드채 사태와 닮은꼴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가계대출 잔액은 982조5천억원에 이른다. 가계대출에 신용카드사의 판매신용까지 더한 가계신용은 작년 말에 1천조원을 넘어선 상태다.

글로벌 금융회사 알리안츠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작년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92.9%를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의 84.3%보다 9% 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작년 말 기준으로 세계 주요 53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65.1%로 집계됐다. 가계발 디레버리징이 진행되면서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의 71.5%보다 6.4% 포인트나 떨어졌다. 한국만 거의 유일하게 GDP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상승하는 등 건전성이 악화됐다.

알리안츠는 "한국이 이자율이 높아지거나 경제성장률이 둔화하면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상당수 과다채무 가계가 채무 불이행에 몰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계의 소득은 늘어나지 않는데 대출이 너무 빠른 속도로 늘고 있지만 당국은 문제가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가계 대출 대부분이 상환 능력이 있는 고소득층위에서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카드 연체율이 올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호언했던 11년6개월 전 당국자들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정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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