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한국사(韓國史) 전체에서 가장 다루기 버겁고 힘든 외부 상대는 중국이었다.

근대 이전까지 한반도 역사는 중국과의 긴장과 평화, 구심력과 원심력, 균형과 불균형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칙사(勅使)대접'이라는 말은 원래 중국 사신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모신다는 뜻이다. 칙사들은 역대로 삼국과 고려, 조선의 내정(內政)과 외치(外治)에 훈수를 두고, 법령과 제도에 대해 컨설팅했다. 유교의 종주국 입장에서 시(詩), 서(書), 화(畵)도 한 수 가르쳤다. 한반도에 대한 내정 간섭과 문화 전수의 대가는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인 외교관의 비위를 잘못 건드리면 한반도에서는 왕의 승계와 사직의 정통성 시비가 일어나기 일쑤였고, 조공의 빈도와 크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 모든 왕조의 입장에서는 이를 선제로 관리하는 일이 국정의 핵심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왕조 5백 년의 경우, 태조 초기에는 원(元)과 명(明) 사이에서 눈치 보느라 고생했고, 선조 때에는 명(明)과 연합군을 조직해 왜(倭)국을 물리쳤다. 인조 때에는 중원의 새 주인이 된 청(淸) 황제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면서 아홉 번이나 머리를 땅바닥에 찧어야 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런 양국 관계는 근세에 와서 서구열강의 등장으로 잠시 주춤했다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대국을 다시 과거보다 더 강력한 모습으로 변신시켜 대한민국 앞에 서게 했다.

과거 5천 년 동안의 관계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된 채 '게임의 룰'만 조금 바뀐 셈이 된 것이다.

현재 중국 지도부는 과거 황제 칙사들과는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강인하고 똑똑해졌다. 7천만 명의 공산당원 중 치열한 경쟁으로 선발되고 훈련된, 이들의 인력의 질(質)은 과거와 비할 바가 아니다.

시진핑을 비롯한 현재의 50~60대 권력 핵심층은 무엇보다 소년 시절 중국 역사상 가장 격동기인 문화 대혁명(1966년~1976년)기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죽창(竹槍) 든 홍위병의 인민재판에 동참했거나 또는 구경했거나, 죽음을 피해 도망을 다녔거나, 들과 강에 즐비한 시체를 뛰어넘으며 생존한 아이들이었다.

현재 지도부의 사고, 감정, 역사관을 이해하려면 중국 현대사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빠져 있는 문화대혁명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들은 이런 체험 바탕 위에 덩샤오핑이 1979년부터 10만 명 국외 유학이란 '통 큰' 결정의 혜택을 입은 세대이기도 하다.

'무서운 생존 능력'에다 '전문지식'까지 보탠 중국의 지도부를 상대로 우리는 한반도 주변의 외교뿐만 아니라, 한-중 FTA의 세부 사안 조율 및 이행과, 원-위안화 직거래, 기업 진출과 투자 등의 먹고사는 문제도 다루어야 한다.

새해에는 역사상 초강대국으로 부활한 대국을 상대로 선조들 보다 더 큰 고민을 해 나아야 할 것 같다.

(취재본부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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