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은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되도록 두었다면 다른 곳으로 향했을 자금을 정부가 정책 수단을 동원해 정부의 목표 달성을 위해 끌어오는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다.

말 그대로 정부가 금융시장에 개입해 시장을 억압하고 왜곡한다는 의미다.

금융억압은 본래 과거 신흥국의 낙후된 금융시스템이나 자본통제 등을 문제 삼을 때 주로 쓰던 말이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로널드 매키넌 교수와 로널스 쇼 교수가 1973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억압은 그러나 최근 들어서 선진국 정부의 통화정책을 비판할 때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경제의 성장이 둔화하면서 이들 정부가 기준금리 인하, 양적 완화 등의 방법을 동원해 금융시장에 개입하는 폭을 크게 확대하고 있는 것이 금융억압이라는 지적이다.

정부의 개입으로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시대가 도래하면서 금융시장의 투자자들은 낮은 수익률에 시달리게 됐지만, 각국 정부들은 낮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해 이자 비용 부담을 덜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부채를 줄일 수도 있게 됐다는 이유에서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학 교수와 베스트셀러가 된 책 『이번엔 다르다』를 저술한 카르멘 라인하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지난해 6월 전미경제연구소(NBER)를 통해 발간한 '금융억압의 귀환(Financial Repression Redux)'이라는 제목의 공동 논문을 통해 1945~1980년에 걸쳐 미국과 영국 등에서 금융억압이 정부부채를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됐으며,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이후 금융억압이 되살아났다고 진단했다.

그는 새로운 은행 건전성 규제방안인 '바젤Ⅲ'가 국채에 위험가중치를 낮게 부여한 것도 은행들의 국채 보유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금융억압의 하나로 봤다.

이런 규제를 도입하면 정부는 은행들을 국채의 고정 수요자로 확보하는 이점을 누리게 된다.

라인하트 연구원의 시각을 따른다면 가장 최근에 시행된 대표적인 금융억압적 조치로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을 꼽을 수 있다.

ECB는 두 차례의 LTRO를 통해 1조185억유로(약 1천512조원)의 막대한 유동성을 유럽 은행권에 지원, 은행들의 국채 투자를 유도하면서 유로존 국가들의 국채 금리를 끌어내린 바 있다.

금융억압은 지속될 경우 시장의 불안을 키운다는 게 문제다.

정부 개입에 따른 시장 왜곡은 결국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수익률에 목마른 투자자들을 주식과 회사채 등 위험자산으로 내몰 가능성이 있다.(국제경제부 김성진 기자)

(서울=연합인포맥스)

sjkim2@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