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온순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춘 일본인의 이중적 성격을 '국화와 칼'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했다. 국화는 평화를, 칼은 전쟁을 의미한다.

베네딕트에 따르면, 일본인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 약자에겐 무자비하고 잔혹하지만 강자에겐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이 '국화와 칼'의 핵심 주제다. 강자에게 투항한 약자는 포용한다.

베네딕트가 이러한 일본의 행동양식을 연구해 미국 국무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이 대일본 정책을 시행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됐다. 그래서 그런지 전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보면 강자인 미국에 복종하는 일본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최근 일본의 경제정책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경제사령탑은 앞으로 통화정책보다는 재정정책을 쓸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일본은행(BOJ)은 지난 주 열린 통화정책 회의에서 추가 양적완화를 놓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고 대신 재무성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겠다고 나섰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10월 중순 미국 재무부가 환율보고서에서 열거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똑같다. 미국 환율보고서는 "일본에 통화정책에 지나친 의존도를 낮출 수 있도록 모든 정책조합을 실행에 옮겨야 하며 단기적으로 성장률 위축을 피하기 위해선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환율보고서의 요지는 일본이 돈을 풀어(통화정책)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경기를 부양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는 기준금리 인상을 앞둔 미국이 달러 강세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환율보고서가 나온 직후 일본 재무성 관리가 재정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일본은 발 빠르게 미국과의 '코드 맞추기'에 들어갔고, 지난 주 BOJ 통화정책 회의를 계기로 '통화정책→재정정책'으로의 기조전환을 선언했다. 베네딕트의 분석처럼 일본은 '강자'인 미국의 요구사항을 한 점도 틀림없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시장에선 일본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유가 하락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압력이 계속되는 이상 추가 양적완화 정책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일본의 문화적, 역사적 특성을 고려할 때 사실상 추가 완화는 물 건너간 듯하다. 이러한 점은 최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경제 교사들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베노믹스의 설계자로 알려진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교수는 최근 "일본은행이 서둘러 금융완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혼다 에쓰로 내각 관방참여(자문역)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일본은행이 추가 양적완화를 하기 보다 최대 5조엔의 재정부양을 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통화정책의 약효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점도 일본 정책기조 변화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베노믹스가 과연 성공한 것 맞느냐는 의구심 속에 돈 풀기 정책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양적 완화의 선구자인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도 재임 당시 돈 풀기만으로는 경제를 살릴 수 없다며 재정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미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했었다. 일본 역시 돈 풀기와 엔저만으로는 정책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정책전환을 서두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제경제부장)

jang73@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