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번째 줄 첫부분 '이 계약이 파기되면..'을 '이 계약이 인출되어 파기되면..'으로 보완합니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일제(日帝)의 엔화(円貨)는 조선의 영혼을 송두리째 갉아먹는 아귀였다.

일제가 조선을 먹은 방식은 엔화를 앞세운 돈의 전쟁이었다. 일본 대장성 이재국 국고과(國庫課)는 군부의 강압에 의해 조선의 침탈에 필요한 자금을 무제한으로다양한 방식으로 조달했다. 병기와 군수품 대금은 엔 표시 대장성 증권, 예금증서, 일본은행권, 단기 군사공채, 지불증명서 등을 통해 마련했다.

조선은 근대화에 필요한 각종 사업에 큰돈이 필요했다. 외국 자본이 한 푼이라도 아쉬웠다. 이를 위해 조차지를 개방하고 광산, 임야, 각종 토지 이용권을 일본에 넘겨줬다. 그러고도 부족한 돈은 엔화 현찰로 빌려 썼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고 돈의 효력은 독했다. 조선 왕실에 엔화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돈의 수혜와 작위(爵位)의 맛을 본 엘리트들은 친일(親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의 역사에서 엔 차관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최근 일본의 한-일 통화스와프 파기 엄포와 한국 국고채 매입 보류 검토 소식을 접하면서 역시 엔화는 한국인들에게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게 하는 화폐라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감정적 대응에 앞서 법적 계약인 스와프 협정 등에 대한 차분히 국가적 손익을 따져봐야 할 시점이다.

한-일 통화스와프란 한국이 일본 엔화를 받고, 일본은 한국 원화를 받는 이종 통화간 교환 계약이다.

이 계약이, 인출되어 파기되면 한국은행 계정상의 엔화는 일본에 반납하고 원화를 수령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한은의 외화보유액 감소를 의미한다. 물론 현재의 보유액이 3천100억 달러를 넘나들고, 한-중 통화스와프 혹은 이미 만료된 한-미 통화스와프의 재가동 등의 가용 옵션에 따라 한-일간 스와프가 소멸한다 하더라도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원화가 국제결제통화 또는 경화(硬貨, hard currency)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현실에서 일단 한국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 일임은 분명하지만, 국가 간 협정은 일방의 이익이 아닌 쌍방의 효익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국가 간 스와프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시에 가산금리가 천정부지로 올라가 단돈 천만 달러의 '라인(Line)'도 아쉬운 때에 선제적으로 유용하게 이용된 보험이었다.

일본 처지에서도 '엔화의 국제화'와 '영향력 확대'에 가장 긴요한 협력국은 한국이다. 중국과의 갈등도 커지는 상황에서 아시아에서 외톨이가 되는 한국과의 통화스와프 폐기 운운은 소탐대실일 수 있는 것이다.

양국의 갈등이 커져 '통화전쟁(Currency War)'으로 이어지고, 이어 '무역갈등',종국에는 양국의 기업에 대한 투자까지 보류되는 '경제 전면전'으로 치닫게된다면 쌍방은 큰 상처만 입을 공산이 크다.

일제의 침탈과 한일 차관협정 등 역사 속에서 엔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유독 강한 대한민국이지만, 달라진 역사 환경 속에서 일본과 대등한 관계에서 스와프 협정을맺은 만큼, 국가 리스크 요인 중 하나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냉정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취재본부장)

tscho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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