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원칙중심규제(principles-based regulation)'라는 말이 드물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원칙중심규제라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쉬운 용어는 아니다. 규제는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규제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를 기준으로 한 규정중심규제(rule-based regulation)와 원칙중심규제의 구분은 큰 의미가 있다. 전자는 일정한 규제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수해야 할 행위 기준을 세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후자는 일정한 규제목적 달성을 위한 구체적 행위 기준이 아니라 해당 규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규제상 결과 그 자체를 규정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고객의 공평한 취급'이라는 규제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규정중심규제에서는 필요한 행위 기준을 규정하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해야 하고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되는지를 상세히 적어주는 것이다. 반대로 원칙중심규제에서는 금융회사는 고객을 공평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원칙만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행위 기준은 금융사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미국의 기업회계기준은 규정중심규제의 그리고 우리나라도 채택하고 있는 국제회계기준은 후자의 접근에 기초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금융규제는 주로 규정중심규제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왜 원칙중심규제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원칙중심규제는 기존의 법률체계에서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상품이나 거래가 나타날 때 유연하고 탄력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금융사 스스로 판단으로 규제준수방법을 정하게 함으로써 규제준수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규정중심규제에서는 금융사들이 세부적인 규정의 자구해석을 통해 규제를 통해 달성하려는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규제의 형식적 준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발견된다. 근본적으로 급속히 변화해 가는 금융시장의 모든 거래나 상품을 세부적인 규정으로 수용하는 것은 입법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접근은 오히려 기술발전과 금융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원칙중심규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점이 많다.

첫째, 법리적인 관점에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으로 구성되는 원칙을 위반한 것을 이유로 제재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법치행정의 원칙상 이러한 접근이 가능한지 문제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규제의 모든 분야를 원칙중심규제의 대상으로 하는 데는 스스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둘째, 구조적인 관점에서 원칙중심규제는 금융사 내부의 준법 내지 내부통제역량에 기초하여 작동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금융사는 특정한 원칙의 준수에 필요한 규칙을 스스로 역량으로 찾아내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역량의 구축을 위한 제도적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상당한 규모의 초기비용을 추가로 부담하게 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셋째, 문화적으로 표준화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개별 금융사의 위험선호도에 따라 적정한 수준의 위험인수를 요구하는 원칙중심규제와 충돌할 수 있다. 표준화에 대한 선호는 금융감독기관의 감독방식과도 관련된다. 감독과정에서도 금융사별로 서로 다른 방식의 규제준수 가능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집행제도의 차이이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금융규제위반에 대하여 형벌을 주된 제재수단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부분적이긴 하지만 집단소송제도도 도입되어 있다. 금융사나 그 밖의 금융시장참가자들은 이러한 제재위험을 관리하기 위하여 100% 확실한 기준에 따르려 할 것이다. 원칙을 제시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 자체가 거래를 회피하게 하는 위축 효과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영국 보다 원칙중심규제의 도입에 소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원칙중심규제는 우리나라 규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기본 틀이다. 금융사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는 자율화 또는 규제 완화를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규제의 모든 분야를 원칙중심규제의 대상으로 하기에는 위에서 본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따라서 법리적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금융사의 내부역량을 신뢰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서 원칙중심규제를 적용하려는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를 그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보교류차단장치이다. 현행 우리 법제는 이에 대하여 엄격한 구조적 장치와 함께 세부적인 기준을 규정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해 상충방지를 위한 정보차단장치의 구축을 원칙으로 제시하고 세부적인 기준은 스스로 정하게 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배구조분야도 마찬가지다. 금융사의 건전성 유지를 위하여 필수적인 항목에 관해서는 규정으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원칙을 제시하고 각 금융사의 소유구조와 위험선호도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운영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원칙중심규제를 규제의 완화 또는 폐지와 혼동하는 의견도 발견된다. 원칙중심규제로의 전환을 위하여 기존에 규정되어 있던 세부적인 규칙을 삭제하는 것을 규제의 폐지로 생각하는 일종의 착시효과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원칙중심규제는 금융사의 내부적 역량을 믿고 규제목적의 달성 또는 규제결과의 확보를 위하여 필요한 일반원칙을 제시하고 금융사가 스스로 이를 준수하는 시스템이다. 단순한 규제의 폐지가 아니라 금융사의 외부에서 공적 규제기관을 통하여 집행되던 규제를 금융사의 내부에서 스스로 노력으로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접근일 뿐이다. 외부적 규제를 내부적 규제로 전환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금융사의 자율성과 책임성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정순섭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 現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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