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주에게 밀린 임금을 요구했다가 동전으로 받았다는 사연이 요즘도 간간이 보도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체납임금 18만 원을 받지 못했다고 노동청에 진정한 근로자에게 체납임금을 10원짜리로 바꿔 지급한 업주에 대한 보도도 있었다. 수십만 원에 달하는 임금을 10원짜리 동전으로 받을 경우 금액의 확인은 물론 운반과 관리의 불편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분실이나 도난의 위험도 무시할 수 없다.

화폐 법적으로 이 문제는 주화의 강제통용력 남용에 해당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화폐 법적으로 찾아보자. 화폐 법은 법화의 발행과 유통 및 관리에 관한 규제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법화는 한국은행'만' 발권할 수 있다. 법화의 첫 번째 개념요소인 통화고권에 근거한 발권력의 독점이다. 법화의 두 번째 개념요소인 강제통용력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정의된다. 한국은행이 발권한 은행권이나 주화는 법화로서 강제통용력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화폐에 관한 기본법인 한국은행법이 한국은행권과 주화는 '법화(法貨)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그 의미이다. 요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가상통화 또는 암호통화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출 수 없어 현재의 화폐 법상 법화에 해당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강제통용력은 채무자가 채무의 이행을 위하여 법화를 제공하였을 때 이를 수령하지 않으면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채권자지체'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본 근로자가 임금의 지급을 위해 제공된 동전의 수령을 거절하면 채무자의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채권자의 채권자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채권자지체가 되면 채무자의 주의의무 경감, 채권자의 책임 가중, 이자의 정지, 위험의 이전 등의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채권자지체 중에는 채무자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불이행으로 인한 모든 책임이 없고, 채권자지체 중에는 이자 있는 채권이라도 채무자는 이자를 지급할 의무가 없으며, 채권자지체로 인해 그 목적물의 보관 또는 변제의 비용이 증가한 때에는 그 증가액은 채권자가 부담하고, 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채권자의 수령지체 중에 당사자 쌍방의 책임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강제통용력이 있다고 해서 밀린 임금을 수천 수만 개의 동전으로 지급하는 것을 반드시 수령해야 할까. 우리 민법은 이를 변제방법의 적정성 문제로 해석하고 있다.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부적정한 방법에 의한 변제의 제공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액의 채무를 10원짜리 동전으로 변제하는 것은 변제방법으로서 적정하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동전에 의한 지급의 변제방법으로서의 적정성은 금액과 회수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한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노동법상 임금의 지급방법을 규제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화폐 법적 관점에서는 더 근본적이고 완전한 해결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동전과 같은 주화에 대해서는 강제통용력의 한도를 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주화의 경우 강제통용력의 한도를 액면가의 20배와 같이 일정 비율로 한정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의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발행은 물론 사용이나 관리에 소요되는 비용과 분실이나 도난의 위험, 그리고 지급수단의 획기적인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필요한 발전방향이라고 생각된다. 힘들게 일한 노동의 대가를 동전으로 받는 불편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면서 지급수단의 발전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수용하는 의미에서 주화의 강제통용력에 한도를 두는 것은 필요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화폐에 관한 기본법인 한국은행법을 개정하여 주화의 강제통용력을 액면가의 일정 배수로 제한하는 규정을 추가하면 된다. 법화의 강제통용력에서 비롯된 문제는 법화의 강제통용력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다. (정순섭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 前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