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한국 증권시장은 '피로사회'다. 성과와 보상 체계가 가장 극명한 곳인 데다 세계 최장 수준의 거래시간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증권시장 종사자들은 성과 중심의 메커니즘에 따라 장시간에 걸쳐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역저 '피로사회'가 비판한 과잉 성과주의의 전형이 한국 증권시장이다.

한국 증권시장의 피로를 조장하는 중심에 한국거래소(KRX)가 있다. 한국거래소가 사실상 세계 최장 수준인 10시간의 운영시간으로 종사자들을 '피로사회'로 내몰고있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는 오전 8시부터 개장전 호가를 접수해 9시부터 거래를 개시한다. 점심시간도 없이 오후 3시30분까지 장을 운영한 뒤 오후 4시까지 동시호가 형태로 2차로 장을 마감한다. 증권시장 종사자들은 거래가 마감된 뒤에도 각종 후속 업무를 처리하느라 연장근무를 하기 일쑤다.





<세계 주요 거래소의 운영시간:연합인포맥스 금융공학연구소 제공>

세계 63개 거래소의 평균 개장시간은 8시간이다. 한국 증권시장 종사자들은세계 평균보다 무려 2시간이나 더 일해야 하는 셈이다. 하루 평균 16시간으로 세계 최장 거래시간을 자랑하는 미국 나스닥 등도 정상적인 운영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다. 나머지는 모두 전산장으로 대체한다.

아시아 권역의 금융중심지 역할을 하는 홍콩은 장 운영시간이 6시간10분에 불과하다. 오전 9시부터 동시호가를 접수해 9시30분에 거래를 시작하고 오후 4시에 장을 마감한 뒤 4시10분에 동시호가도 마감한다.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점심시간이다.

일본 도쿄거래소는 실질 운영시간이 6시간에 그친다. 오전 8시부터 동시호가를 시작해 9시에 개장하고 오후 3시에 장을 마감한다. 11시30분부터 12시30분까지 한 시간은 점심시간으로 거래를 하지 않는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대만도 실질 운영시간은 6시간이다. 대만은 점심시간이 없는 대신 오전 8시30분부터 동시호가를 접수해서 9시에 개장해 오후 1시30분에 1차로 장을 마감하고 2시30분에 장을 최종 마감한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증권시장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 실질 운영시간이 4시간에 불과하다. 상하이 거래소와 선전 거래소 모두 9시30분에 개장해서 오후3시에 마감한다. 11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점심시간도 90분이나 된다.

주 52시간 근무시대가 개막됐지만 한국의 증권시장 종사자들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열풍이 거세다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뜻)도 일부 증권 유관 공기업들의 전유물처럼 들린다.

한국증권시장만 유독 거래시간이 길어졌다. 시장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점심시간도 없어졌고 박근혜 정부시절에는 거래시간도 30분이나 추가됐다. 거래시간이 길면 거래량이 많아져 증권시장도 활성화된다는 게 명분이었다.

거래 시간을 늘린 기간에 한국거래소의 거래량이나 거래대금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해당 기간 한국거래소의 주가지수 상승 탄력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홍콩, 일본, 대만 등은 짧은 거래 시간에도 평균 세 배나 주가지수가 뛰었지만 한국의 주가지수는 2017년 4월까지 코스피지수 2,000선을 중심을 게걸음 장세만 보였다.

한국거래소는 해당 기간에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주가지수선물 옵션 시장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등 퇴행을 거듭했다. 세계 최고의 전산 실력을 가진 인력을 가지고도 야간 개장을 위한 전산장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동안 거래소 이사장을 비롯해 각 본부장(부이사장급)에는 퇴직 관료들이나 금감원 출신들이 대거 똬리를 틀었다. 거래소 선진화와는 거래가 먼 인사 행태였다.

이제 거래소는 운영시간을 좀 줄여야 한다. 물리적인 개장시간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전산장 개발 등 관련 제도만 개선하면 짧은 거래시간에도 거래소 운용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증권시장 종사자를 피로사회로 내모는 거래소의 행태가 소설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주인공과닮은꼴이 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섬에 천국을 세워주겠다며 나병환자 등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제하면서도 소통하는 데 실패한다. 거래소도 증권시장 종사자들과 교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취재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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