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동창회가 많아지고 참석하는 횟수도 늘어난다. 옛날 추억으로 잔을 기울이다가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예전에 나보다 공부 못 했는데…',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르네' 등등. 학교 다닐 때보다 나아진 친구들이 부러움과 질투를 한몸에 받는다. 그 친구들이 그동안 얼마나 땀 흘렸는지는 관심이 없다. 때로는 '과거의 서열이 그대로 유지되었더라면 세상이 조용할 텐데'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본의 쇼군과 조선의 양반 모두 바깥 세계의 변화를 무시하거나 저항했다. 쇼군은 1635년부터 두 세기 이상 동안 일본 배의 외국 항해를 금지하고 외국 배의 일본 입항을 금지하였다. 교류 단절로 일본은 발달한 선진 문물에 접할 기회를 놓쳤고, 칼로 무장한 사무라이들은 철갑과 총포로 무장한 서양 군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조선 왕조와 양반도 변화에 눈 감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원군은 기독교와 서양 열강이 조선의 근본을 흔든다는 생각에 쇄국하였다. 쇄국한 지 10년 만에 조선 군대는 일본군 1개 대대도 제대로 대적하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졌다.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변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결혼은 남녀 모두에게 큰 변화이다. 그러나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남녀는 각자의 종전 생활방식을 고수한다.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는 큰 원인이 된다.

필자도 결혼 후 남자는 부엌에 드나들지 않는다는 관습을 고수한 적이 있었다. 남녀평등 의식이 발달한 외국에서의 생활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그 관습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변화가 정말 어려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수천 가지이겠지만, 결론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변화는 기득권을 흔든다. 필름업계 강자였던 코닥의 필름사업부는 디지털 시대의 급속한 도래를 알았지만, 필름 사업의 기득권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양반도 서양의 과학과 이론으로 무장한 신흥세력에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스웨덴 사람들은 높은 세금을 내지만 감세를 주창하는 정당에 거부감이 많다고 한다. 감세로 자신들이 받는 복지혜택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변화는 불편을 낳는다. 변화는 관성 때문에 물리적·정신적인 불편을 야기한다. 아내가 집의 책상 배치를 바꾸려 도와달라고 하면, 남편은 몸을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본능적으로 내키지 않는다. 조선이 망할 때 반상의 도가 무너짐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로 목숨을 버린 양반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 특히 어른은 변화할 수 있을까. 정말 어렵다고 본다. 변화의 불이익은 분명하고 이익은 불확실하므로 변화하려는 사람이 이상해 보인다. 그래서 변화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는 변화하지 않는다.

'궁즉통(窮則通)'이라 했다. 칼이 총으로 완전히 제압당한 이후에야 사무라이는 상투를 잘랐다.코닥은 파산을 겪고 나서야 사업모델을 변경해 디지털 시대에서 살아남았다. 달리 말하면 변화의 가장 큰 동인은 사멸(死滅)의 위기이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똑똑하고 강한 종이 아니라 변화하는 종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하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주제넘기에 변화를 인정하는 자세를 갖자고 제안해 본다. 각자가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여러 관계에서 변화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 남녀 관계, 교사와 학생 관계, 친구 관계, 상사와 부하 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 사용자와 노동자 관계 등등….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변화를 인정하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남에게 덜 주고 나도 덜 받고 살 수 있다.

사방에서 변화를 외치니 마음이 불편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능력과 기술이 좋아지는 것은 고사하고, 퇴보하기에 변화는 두렵다. 자신이 변화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다른 사람의 변화를 인정하여 존중하는 노력을 해 보자. 옛날에 나보다 못했던 친구에게 ‘열심히 잘 살았구나’라고 격려해 주면, 나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성대규 보험개발원장/前 금융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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