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현정 기자 = "다음 주가 아내 생일인데 김 지점장이 선물 좀 챙겨 주지그래. 샤넬 지갑이 갖고 싶은가 보던데…"

A 은행 강남 압구정동 PB센터 김 지점장은 한 VIP 고객으로부터 이런 요구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생일 축하 떡 케이크나 하나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00만 원이 넘는 선물을 하자니 업무추진비로는 모자라고, 자비를 털어서라도 선물을 챙겨줘야 하나 망설여졌다.

하지만 김 지점장은 거액을 예치해 놓은 이 고객이 행여 선물 하나로 기분이 상할까 두려워 점심시간에 짬을 내 백화점에 다녀오기로 했다.

올 초 잠실의 한 PB센터로 발령받은 B 은행 지점장은 매일 아침 헬스클럽을 찾는다.

5억 이상 예치해 둔 한 VIP 고객의 "몸매 관리 좀 해야겠다"는 충고 때문이다.

이 고객은 "이 전 지점장은 안 그랬는데 새로 온 지점장은 본인 관리에 소홀한 것 같다"며 "살 좀 빼라"고 자극했다.

늦은 밤까지 거래처 고객들을 접대하고 집에 들어가면 1시간이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운동을 늦출 수 없다.

개인금융의 꽃이라 불리는 프라이빗 뱅커(PB)들의 애환이다.

은행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이긴 하지만 깐깐한 VIP 고객들을 상대해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최근 들어 시중은행들의 자산가 모시기 경쟁이 과열되면서 PB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금융자산 기준이 대폭 하향되는 등 관리해야 하는 고객 수도 늘고 그만큼 고충도 커졌다.

저금리 기조가 지속하면서 은행들이 예대마진으로 수익을 내는 건 한계에 도달했다. 정부의 가계대출 규제로 자산을 늘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산관리는 비이자 수익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다.

일반 리테일 고객까지도 PB 서비스를 확대해 펀드, 방카슈랑스, 신탁 등 다양한 상품을 통한 각종 수수료수익을 내야 하다 보니 실적 압박도 커졌다.

VIP 고객을 놓칠세라 PB센터장들은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요구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줄 수밖에 없다.

한 은행 PB센터장은 "VIP 고객이 골프를 함께 나가자 해서 약속을 잡았는데 친구 4명을 데리고 와서 당황했던 적도 있고, 공연 티켓 5장을 구해달라 했는데 망설이자 금방이라도 돈을 뺄 것처럼 얘기해 자비를 털어 선물하기도 했다"며 "업무추진비는 한정돼 있는데 요구도 거절할 수도 없어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로봇어드바이저 등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자산관리 서비스가 본격화되면서 PB센터장들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서비스를 더 강화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저금리에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더 얻고자 하는 고객이 증가하면서 자산관리 서비스 수요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며 "자산운용 외에도 회계, 법률, 의료 등 각 전문 분야까지 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추세다 보니 역량 갖추기도 예전만큼 쉽지 않다"고 말했다.

hjlee@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