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현금 없는 사회에 관한 논의가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금이 없어진다는 것은 현재 이용되고 있는 예금계좌를 통한 자금이체나 이를 이용한 직불카드 그 밖의 자금이체형 간편결제수단, 신용카드 등 다른 지급수단이 그 역할을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이 직접 디지털 통화를 발행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현금 보유에 따른 도난이나 분실위험, 은행권이나 주화의 발권이나 발행에 소요되는 비용 등을 고려할 때 충분히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나라도 있다.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현금선호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최근의 지급결제수단 이용 현황을 보면 현금 사용비중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기초에는 기술적 발전이 존재한다. 반드시 현금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내년부터 우리나라는 증권을 전자등록방식으로 발행하는 전자등록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증권의 전자등록제도는 종이 형태의 실물증권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무권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도입 근거도 실물증권의 보유에 따른 도난이나 분실위험, 증권의 발행에 소요되는 비용 등을 제거하거나 감소시킨다는 데서 찾는 점도 현금 없는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과 같다.

그러나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현금 없는 사회의 구상에도 장단점이 존재한다. 장점으로는 현금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도난이나 현금거래를 이용한 불법거래의 감소, 세원발굴이나 자금세탁규제의 효율화, 환전 수요의 감소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단점으로는 개인정보의 집중 및 노출, 해킹 등으로 인한 시스템 오류나 무작동 시 대체적 지급수단의 부재 등과 함께 비용부담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특히 모바일 지급수단에 대한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계층의 불편을 포함한 금융포용의 문제도 고려되어야 한다.

현금 없는 사회로의 변화를 위하여 법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법화의 강제통용력이다. 한국은행법에서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과 주화는 '법화(法貨)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의미는 채무자가 현금으로 지급하는 것을 채권자가 수령하지 않으면 채무불이행이 아니라 채권자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간혹 보도되는 밀린 임금을 동전으로 지급하는 문제도 주화의 강제통용력과 관련된다.

스웨덴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스웨덴 중앙은행법도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이나 주화를 강제통용력 있는 법화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변제방법에 관한 당사자 간 합의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상인들이 그 가게에서는 현금을 수령하지 않음을 미리 입구에 게시물 등의 형태로 고지하고, 해당 고지내용을 알고 그 가게에 들어온 고객과 상인 간에는 변제방법에 관한 특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은행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지급수단으로서의 현금의 운명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에 기초하여 판단할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예금계좌를 통한 자금이체에 기초한 모바일형태의 간편결제수단 이용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상황이 된다. 그런데도 정답은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급결제수단으로서의 현금의 기능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법 제도는 시장의 변화를 예측하여 이를 수용하고 법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보완해가야 한다.

약 1년여 전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를 위한 구상을 밝혔다. 현금 없는 사회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점을 고려하여 적용대상을 동전에 한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같은 법률문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지급수단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물론 기술적 기반의 확보를 위한 노력과 함께 법 제도적 고려사항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정순섭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 前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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