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모피아'의 본진인 금융위원회가 변하고 있다. 금융시장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해서다. 금융위는 지난 주말 발표한 업무보고를 통해 해외펀드 기준가 산출 시점을 변경하기로 했다. 고무줄 잣대였던 해외펀드 기준가 산출 시점은 사무관리회사 종사자들의 살인적인 야근을 강요하는 금융시장의 대표적인 구습 가운데 하나였다. <본보 2018년 11월19일자 '펀드기준가 보다 사람이 먼저다' 기사 참조>



◇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당국

금융위가 지난 10일 발표한 '현장혁신형 자산운용 산업 규제개선'에 따르면 글로벌 채권 등 해외자산의 경우 기준가격의 반영시기를 시차와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당일(T일)에서 익영업일(T+1일)로 변경했다. 기초자료 입수 컷오프(Cut-off) 시간은 오후 6시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앞으로 제도 운영 과정에서 글로벌 기준에 맞게 추가로 조정될 필요가 있다.

일부 아쉬운 대목이 있지만, 금융위 당국자의 전향적인 태도는 평가받아 마땅하다. 기초자산이 컷오프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당일 기준가 산출에 반영하지 않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갑의 위치인 자산운용사의 편의보다 밤을 새워 일해야 하는 을의 입장을 정책에 먼저 반영했다. 펀드 기준가 산출 시점은 자산운용업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당사자 간 이해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서다. 펀드를 운용하는 입장에서는 기준가 산정을 늦출수록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펀드 기준가 산정이나 수정 공시에 대한 자산운용사의 책임을 강조한 대목도 돋보인다. 을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금융당국의 전향적인 정책의지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당일에 반영되지 않아서 기준가 오류율이 법정한도를 초과하면 사후적으로 당일 기준가격에 반영해 수정하도록 했다. 자료 지연에 책임이 있는 운용사는원인과 수정 기준가격을 공시해야 한다.

그동안 펀드 기준가를 산출하는 일반사무관리회사 종사자는 채권과 주식 등 펀드에 편입되는 자산의 종가를 취합해서 기준가를 산정하느라 이틀에 하루꼴로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등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금융산업의 대표적인 '을'이었다. 종사자들이 과도한 업무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속속 이탈하면서 한 때 이직률이 35%까지 치솟기도 했다.

◇세계 최장의 거래시간 강요하는 KRX

당국인 금융위는 변하고 있는데 가장 시장 친화적이어야 할 한국거래소(KRX)는 `마이동풍'이다. KRX가 세계 최장시간인 10시간에 이르는 거래시간을 조정해달라는 증권시장 참가자들의 요구를 귓등으로 듣고 있어서다. KRX는 오전 8시부터 개장 전 호가를 접수해 9시부터 거래를 개시한다. 점심시간도 없이 오후 3시30분까지 장을 운영한 뒤 오후 4시까지 동시호가 형태로 2차로 장을 마감한다. 증권시장 종사자들은 거래가 마감된 뒤에도 각종 후속 업무를 처리하느라 연장근무를 하기 일쑤다. <본보 2018년 7월16일 '피로 권하는 KRX와 당신들의 천국' 참조>





<세계 주요 거래소의 운영시간:연합인포맥스 금융공학연구소 제공>



세계 63개 거래소의 평균 개장시간은 8시간이다. 한국 증권시장 종사자들은 세계 평균보다 무려 2시간이나 더 일해야 하는 셈이다. 하루 평균 16시간으로 세계 최장 거래시간을 자랑하는 미국 나스닥 등도 정상적인 운영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다. 나머지는 모두 전산 장으로 대체한다. 아시아 권역의 금융중심지 역할을 하는 홍콩은 장 운영시간이 6시간 10분에 불과하다. 오전 9시부터 동시호가를 접수해 9시30분에 거래를 시작하고 오후 4시에 장을 마감한 뒤 4시10분에 동시호가도 마감한다.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점심시간이다. 일본 도쿄거래소는 실질 운영시간이 6시간에 그친다. 오전 8시부터 동시호가를 시작해 9시에 개장하고 오후 3시에 장을 마감한다. 11시30분부터 12시30분까지 한 시간은 점심시간으로 거래를 하지 않는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대만도 실질 운영시간은 6시간이다. 대만은 점심시간이 없는 대신 오전 8시 30분부터 동시호가를 접수해서 9시에 개장해 오후 1시 30분에 1차로 장을 마감하고 2시 30분에 장을 최종 마감한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증권시장 가운데 하나인 중국은 실질 운영시간이 4시간에 불과하다. 상하이 거래소와 선전 거래소 모두 오전 9시30분에 개장해서 오후 3시에 마감한다.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점심시간도 90분이나 된다.

이른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인 'Work-life balance'의 준말)이 대세인 세상이 되고 있다. KRX도 더는 물리적인 개장시간에만 집착하는 구시대적 운용패턴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전산장 개발 등 관련 제도만 개선하면 짧은 거래시간에도 거래소 운용효율을 극대화할 길은 많다. (취재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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