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한국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투자에도 지식재산권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다. 미국과 일본 등 지식재산권 선진국들은 소프트웨어 등 원천기술 개발에 주력하는 반면 한국은 단기 성과 위주의 연구에 재원을 집중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

◇세계 1위 R&D 투자 비중에도 원천 기술 없어 초라한 성적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 따르면 한국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2017년 기준 4.55%로 이스라엘을 제치고 다시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연구개발 투자액 절대 규모도 78조8천억원으로 세계 5위 수준이다. 이스라엘이 4.25%로 우리 뒤를 이었다. 일본(3.14%),독일(2.93%),미국(2.74%),중국(2.11%) 등이 주요 투자국에 이름을 올렸다.

투입된 재원에 비해 한국의 지식산업 성적표는 초라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8년 우리나라의 지식재산권 무역수지는 7억2천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그나마 전년대비 9억6천만달러나 개선된 결과다. 산업재산권은 적자규모가 전년 21억5천달러에서 16억억달러로 축소됐고 저작권은 흑자규모가 5억9천만달러에서 14억달러로 확대됐다. 게임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늘어난 결과로 풀이됐다.

더 심각한 부분은 한국 지식경제 산업이 뚜렷한 경로 이탈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개념설계역량 혹은 원천기술이 없이 제조업 중심으로만 성장을 해온 결과다. 소프트웨어 가격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환경 탓에 국내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산업은 모바일폰 앱 베이스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집중 육성 대상으로 추진되고 있는 스마트팩토리 등도 코딩 중심의 전산 분야에만 집중되면서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 전산 전문가들은 마이크로 세컨드(microsecond:백만분의 1초) 단위로 수천만건의 데이터가 처리돼야 하는 현장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작 원천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은 스마트팩토리 구축과정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제조업 성공의 '휴브리스'에 빠진 한국 경제계

서울대 이정동 교수는 '축적의 길'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같은 문제를 뼈아프게 지적했다. 한국만 정상적인 지식재산권 이동 경로를 이탈하고 있다는 게 이교수의 진단이다. 이교수는 가로축이 1인당 국민소득이고세로축이 지식재산의 무역수지를 나타내는 이른바'하프스마일곡선(그림)'을 바탕으로 한국의 지식재산권의 현주소를 가감없이 보여줬다. 하프스마일 곡선을 보면 한국의 지식재산권 무역수지는 1980년대부터 적자를 기록한 뒤 2000년대 들어 적자폭이 더 확대됐다. 스위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늘어나는 궤적을 따라 지식재산무역수지고 함께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덴마크,독일,프랑스,이스라엘 등도 궤적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 스웨덴 ,핀란드,미국,일본 등은 지식재산무역수지가 국민소득 증가 속도를 넘어선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 경제성장의 글로벌 우등생이다. 지식재산권 부문에서만 유독 약점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한국 경제계가 조선업,전자산업,자동차산업 등 20세기형 제조업 부문의 성공에 취해 교만해진 건 아닌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교만은 그리스어로 휴브리스(hubris)라고 한다. 휴브리스라는 병에 걸리면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 눈앞의 현실을 보지 못하니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도 감지하지 못한다. 오만에 빠져 눈 뜬 장님이 되었을 때 찾아오는 불행을 그리스인들은 네메시스(nemesis)라고 했다. 이 때 네메시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앙갚음, 보복의 의미가 아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았을 때 감수해야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휴브리스와 네메시스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걸작 가운데 하나가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먼저 "나는 이스마엘이라고 해(Call me Ishmael)"라는 대목으로 시작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이 혼돈의 상징인 바다의 선원으로 채용될 때 하는 말이다.이스마엘은'신이 그의 울부짖음을들으신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성서에서도 온갖 역경을 겪은 인물의 상징이다. 이스마엘은 힘든 역경에도 결국 살아남는다. 휴브리스, 즉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브리스에 사로잡힌 선장 아합은 자신을 포함해 선원 모두를 잃는다.

한국 경제계도 이제 익숙했던 것들을덜 익숙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아합보다는 이스마엘이 돼야 우리 안의 위대함을 되찾을 수 있다.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취재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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