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소재기술 분야는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4만불 시대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정복해야 할 핵심요소 기술이다. 성공적인 패스트 추격형 기술개발을 통해 메모리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지만, 중국 등 신흥국의 추격위협 속에서 가공ㆍ조립기술을 이용한 세계 1위 전략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핵심소재의 대일무역 의존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중국 소재기술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자문회의를 주재하면서 한 발언이다. 일본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 에칭가스 등 3가지 품목에 대해 수출을 규제한 데 이어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 대상국인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제외한 이후 나왔을 성싶지만, 정작 발언의 시기는 2015년이고 발언의 주체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소재ㆍ부품ㆍ장비 부문에 대한 일본 의존도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정권을 떠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적 노력이 지속했음에도 해결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8일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통해 이를 '한 세대 밀린 숙제'라고 평가했다. 홍 부총리는 지난 1986년 경제기획원 수습사무관으로 일할 때도 과도한 대일 소재ㆍ부품ㆍ장비 수입의존도가 문제였는데, 한 세대 전에 숙제를 풀지 못한 탓에 30년이 지나 경제부총리 자리에서 소재ㆍ부품ㆍ장비 자립화 대책을 다시 수립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소재ㆍ부품 분야의 자립화는 어떤 산업보다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존 정책들이 완전히 폐기되는 한국의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재산업이 기초과학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대기업들의 입장에서도 장기간 비용을 들여 지속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보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행태는 일본이 한국에 핵심부품 수출규제를 통한 경제전쟁을 선포하는 빌미가 됐다. 소재·부품 분야의 높은 대외의존도를 한국 핵심산업의 아킬레스건으로 판단하고 공격한 셈이다.

정부는 내년 예산에서 1년 내 20개, 5년 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등 6대 분야 총 100개 품목 자립화를 위해 관련 연구개발 예산을 올해 6천억원에서 내년 1조3천억원으로 늘렸다. 여당과 정부는 2022년까지 5조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연구개발을 중심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겠다고 밝혔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소재ㆍ부품ㆍ장비 핵심품목의 기술자립을 강화하기 위한 연구개발정책을 추진한다는 의미다.

다만 정부 대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소재산업을 육성할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후속 조치도 마련돼야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따른 보여주기식 임시방편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각의 근본적인 대책이 병행돼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축적의 길'이란 책에서 "혁신은 소걸음으로 걷는다. 기술 선진국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오랜 축적의 시간, 그 끝에서 개념설계 역량이 숙성되고 쌓여야 한다. 출발이 늦은 국가와 기업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거짓 없이 진득하게 인내하면서 오래 끓이지 않고, 제대로 된 육수를 얻는 방법은 없다"고 지적했다.

소재·부품 산업 자립화는 하루아침에 완성하기 어려운 숙제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전쟁으로 새삼스레 중요성을 깨닫게 된 소재ㆍ부품산업의 국산화라는 숙제를 이번에도 미룬다면 자칫 109년 전 오늘, 우리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를 경제 분야에서 다시 당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책금융부장 황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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