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서별관회의와 열석발언권, 그리고 '척하면 척'. 과거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뒤흔들었던 시그니처 단어들이다.

청와대가 주도하는 서별관회의는 공교롭게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열리는 때가 많았다. 한은 총재가 회의에 다녀오고 나면 기준금리가 조정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총재의 서별관회의 참석 여부가 화제 몰이를 하던 시기였다. 2015년 이후, 적어도 최근 몇 년간은 서별관회의가 열린 적이 없다.

한국은행법 91조는 기획재정부 차관이나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열석(列席)해 발언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열석발언권 제도다. 유명무실한 제도였으나, 2010년 1월부터 기재부 차관이 직접 금통위 회의에 참석했다. 차관이 정부 측 입장을 전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부가 사실상 한은 금통위의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3년여 만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물론 정부 관료의 금통위 참석은 없다. 최근에는 열석발언권 제도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최경환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2014년 9월 "척하면 척" 발언은 한은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멘트로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최 전 부총리가 이주열 총재와 저녁 와인 회동을 한 이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었냐는 질문에 짧게 내뱉은 답변이었다. 현 정부 들어서도 홍남기 부총리 등이 통화정책 관련 발언을 내놓기는 했으나 그 강도는 이전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그럼에도 때아닌 한국은행 독립성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은 국정감사 현장에서다. 엄용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경기순환 주기에 맞춰야 하는데 경기 상승기에 금리가 수차례 인하되고 경기 하강기에는 금리가 인상됐다"며 "엇박자를 낸다는 판단이 든다. 정부 입김이 들어가 독립적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같은 당 추경호 의원은 한은이 최저임금 관련 연구용역 보고서를 내면서 정부의 입맛에 맞춰 왜곡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한은 안팎과 금융권에선 정치권의 이런 지적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은의 독립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된 상태라는 데 이견이 크게 없는 분위기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거론하는 곳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책금리를 더 낮추라고 공공연하게 연준을 압박하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해임 또는 좌천시킬 것이란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과거 정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오명을 받기도 했던 한국은행이 어느새 연준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의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는 셈이다.

중앙은행은 독점적 발권력을 행사하고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금융위기 시에는 '최종 대부자'로서 금융안정의 수호자 역할도 다해야 한다. 우리 경제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한은이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시장으로부터 충분한 수준의 독립성을 보장받으려면 그만큼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디플레이션을 둘러싼 논란과 걱정이 한창인 지금 한은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칫 정책 실기로까지 이어진다면 우리 경제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금융시장부장 한창헌)

chhan@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08시 41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