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기업들과의 접점이 많은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올해 인수·합병(M&A) 시장을 두고 '그저 그렇다'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경기가 어렵다 보니 기업들은 투자를 꺼린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M&A에 대한 니즈도 줄어든다. IB 입장에선 벌이를 위해 발품을 더 팔아야 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라(buy)는 조언보다는 팔라(sell)는 제언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나마 그렇게 나온 매물들에 입질하는 곳은 어김없이 대형 사모펀드들이다. 초저금리 상황에서 풍부한 유동성을 확보한 사모펀드들엔 좋은 기회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대기업들도 움찔하지만, 결국엔 마음을 돌린다. 일단 아끼고 아끼자는 심리가 강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M&A 시장에 형성되고 있다. 물건을 통째로 사 주인행세를 하기보다는 지분을 공유해 공존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려는 기류다. 피를 섞어 동맹을 맺는 이런 사례들이 최근 줄줄이 나오고 있다.

이해진과 손정의가 손을 잡았다.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포털 공룡이 검색과 메신저, 커머스, 금융 등의 간편결제 등을 두고 새로운 모색에 나서려는 시도다. 누가 누구를 먹는 딜이 아닌 50대 50의 공동경영 구도다.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의 '피의 동맹'이다. 두 기업은 공동전선을 구축한 것만으로 벌써 1억명의 이용자를 확보한다. 네이버 라인의 주 무대인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장하면 이용자 수는 수배로 늘어난다. 쉽게 말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기회는 더욱 늘어난다. 일본과 동남아 시장에서 새로운 알리바바가 탄생할 수도 있다. 손정의의 돈과 이해진의 창조적 콘텐츠의 시너지가 폭발하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수도 있다. 둘의 신뢰 관계가 깨지지만 않는다면 한일 기업사(史)에서 역대급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자. 네이버와 야후재팬과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SK텔레콤과 카카오가 피를 섞었다. SK텔레콤은 카카오가 발행하는 신주를 인수하고, 카카오는 SK텔레콤의 자사주를 매입했다. 3천억원 규모지만 지분 맞교환의 의미는 남다르다. 단순히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 식으로 지분을 교환했던 과거의 기업들 사례와는 다르다. 양사가 지분을 서로 보유하기로 한 주 된 이유는 ICT 각 분야에서의 협력 관계를 구축해 보자는 차원이다. 서로의 지분을 넘겨주면서 구속력을 갖추자는 의도다. 네이버와 야후재팬과 같이 공동경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의 성찬에 그치지는 말자는 것이다. 통신과 커머스, 디지털 콘텐츠, 금융서비스까지 양사가 고민해야 할 미래는 차고 넘친다. 양사의 대표 경영인들이 상시 협의체를 만들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피의 동맹'은 비단 ICT 기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산업의 혁명적 변화를 예측하는 현대차그룹도 동일한 반열에 오른 곳 중 하나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에서 세계적 기술력을 보유한 미국의 앱티브와 40억달러 가치의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양사는 합작사의 이사를 동수로 구성하고, 공동경영에 나선다. 현대차그룹을 이끄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현대차와 기아차가 더는 내연기관에 의존하는 자동차 회사로는 연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현대차의 미래에서 자동차는 절반만 차지하고, 플라잉카로 불리는 개인항공기(PAV)와 로보틱스가 나머지를 차지할 것이라고도 장담했다. 앱티브와의 합작사 설립은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이다. 유럽과 미국, 이스라엘은 물론 국내의 다양한 기술력을 가진 스타트업들에 수백억씩 투자를 지속하는 것도 미래를 위한 투자다. 눈에 번쩍이는 물건을 사서 주인 행세하지 않고 실속있게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다.

기업들 간 '피의 동맹'속에 내재된 핵심 키워드는 미래다. 예측이 쉽지 않은 미래의 위협을 기회로 만들기 위해 공존을 택한 셈이다. M&A도 공유경제의 틀 속에서 바라보는 식이다. 단순한 리스크 관리 차원을 넘어 기회의 확장에 더 강하게 베팅하려는 의도다. 내가 가진 기술과 자본, 맨파워를 독점하지 않고 공유, 공존함으로써 시너지를 더욱 확장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독점이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있다. 서로가 가진 자산과 기술을 나눌 때 그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그간 우리 기업의 병폐로 지적돼 온 불투명한 경영행태가 개선되는 기회는 덤이 될 것이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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