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불량기업과 '낙인효과'
[데스크 칼럼] 불량기업과 '낙인효과'
  • 고유권 기자
  • 승인 2020.03.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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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언제쯤 끝날지 예측하는 것은 현재로선 무의미해 보인다.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이 집계한 코로나19 전 세계 확진자는 47만명(26일 기준)을 넘어섰다. 사망자는 이미 2만명을 돌파했다. 미국의 확진자 수는 중국을 넘어서 세계 1위가 됐다. 이탈리아 확진자 수가 중국보다 많아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한 코로나19는 다시 아시아로 향할 조짐이다. 다음 타깃은 일본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올림픽 연기를 발표한 이후 일본 내 확진자 수가 급증하는 것은 심상치 않다. 급기야 일본 심장부인 도쿄를 봉쇄하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제한하는 각국의 조치들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현시점에서 각국의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코로나19 뿐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전 세계 산업과 밸류체인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각국이 발 빠르게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 나서면서 금융시장은 그나마 안정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언제 다시 요동칠지 모른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한 양상은 계속된다. 실물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쓸 대응책은 많지 않아 보인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과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이 코로나19에 허덕이고 있는 것만 봐도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사치다. 유럽에 이어 일본까지 무너진다면 전 세계 경제는 말 그대로 공황 상태가 될 것이다. 그래서 각국이 마구마구 쏟아내고 있는 각종 경제·금융 대책들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금융시장에서 보여주는 숫자들의 움직임이 조금 무뎌졌다고 해서 상황이 호전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업들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버티고 또 버틸 수 있었지만 조금씩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좀 더 버틸 수 있는 영양분을 당장 투입하지 않는다면 결국 폭발하고 말 것이다. 이미 그런 조짐이 국내 여러 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항공기는 자동차만도 못한 기계가 됐다. 항공사들은 개점 휴업 상태이고, 수많은 직원은 집으로 돌아갔다. 코로나19의 전 세계 확산과 봉쇄 조치에 대기업들의 글로벌 공략 거점인 현지 공장들은 잇따라 멈추고 있다. 면세점은 도서관처럼 변했다. 국내 1위의 멀티플렉스인 CJ CGV는 30%에 달하는 극장의 문을 닫는다. 돈을 벌 의지가 있어도 돈을 벌 수 없는 기업들이 늘어가고 있다. 매출이 안 나오니 고정적으로 써야 할 운영자금은 고갈돼 가고 있다. 무급휴직과 희망퇴직도 잇따르고 있다. 온전히 회사로 돌아가 이전처럼 업무를 보지 못할 것이란 불안도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업들이 도산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을 내놨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중소·중견기업에 더해 대기업까지 혜택을 볼 수 있는 금융 패키지 프로그램이다. 금융시장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기업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안이다. 신규 대출은 물론 회사채 발행을 안정적으로 돕겠다는 계획이다. 늦었지만 환영할만한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가 밑에서부터 위로 서서히 확산해 국가 전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책만 내놓고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된다. 대통령도 강조했듯이 속도가 중요하다. 물 흐르듯이 기업의 계좌에 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인공호흡기는 비로소 입에 갖다 대어야 효과가 있다. 산소통만 틀어 놓는다고 역할을 할 수는 없다.

정부가 발표한 금융 패키지 대책 가운데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주목한다. 이번 대책 가운데 사실상 온전히 대기업을 중심에 둔 유일한 대책이다.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기업에 자금을 원활하게 공급하고 회사채 시장 경색 현상을 완화하는 대표적 단기 처방 카드다. 구조는 간단하다.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하면 80%를 산업은행이 인수하고, 다시 채권은행과 신용보증기금에 매각하면 신보는 이를 기초로 신용보강을 통해 프라이머리(P)-CBO를 발행한다. 결국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다시 시장에 흘러갈 수 있도록 국책기관들이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자금 조달에 애로를 겪는 기업은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어 좋고, 기관투자자들은 정부 기관이 신용을 보강해 우량물로 변신시킨 유동화증권에 투자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기업들이 이 좋은 제도를 마냥 반기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공적자금을 기업에 투입하는 데 따른 여러 제약 조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인수하는 산은과 신보 등은 특혜 논란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에 까다롭게 군다. 자구노력이라 불리는 조건을 붙이기 마련이다. 자구노력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별도의 가이드라인을 통해 정해지지만 그 과정에서 시장에 전달되는 시그널이 왜곡되는 수도 있다.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신청한 기업이 마치 '불량기업'인 것처럼 비칠 수 있어서다. 과거 국책기관들은 자구노력과 고통 분담을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낙인(烙印) 효과'다.

과거 이 제도를 실제 활용한 기업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기왕에 제도를 부활해 활용할 것이라면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이 제도를 활용하고 싶어하는 기업들은 어설픈 부실경영으로 망가진 과거의 기업들과는 다를 것이다. 코로나19 직격탄에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자금에 압박을 받는 기업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기업이 불량기업은 아닐 것이다. 과거 구조조정의 잣대로 기업들을 바라보면서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최소한의 자구노력은 필요하다. 그럼에도 가뜩이나 어려워 은행까지 찾아온 기업들에게 낙인을 찍지 말고 문전에서 박대하지는 말자. 이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받아 위기가 끝난 뒤에도 정상기업으로 남을 수 있게 우산을 활짝 펴야한다. 그래서 금융의 역할이 더 필요할 때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pisces738@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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