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정몽규와 이동걸의 딜레마
[데스크 칼럼] 정몽규와 이동걸의 딜레마
  • 고유권 기자
  • 승인 2020.04.0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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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지난달 20일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옛 청운동 자택에 범(汎)현대 일가가 모여들었다. 정 명예회장의 19주기를 맞아 가족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정 명예회장의 부인 고 변중석 여사의 12주기 제사가 있었던 지난해 8월 16일 이후 약 7개월 만에 범현대 일가가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은 물론 장손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등이 함께했다. 조카인 정몽규 HDC 회장도 청운동을 찾았다. 오랜 만에 만난 가족끼리 이런 저런 덕담이 오갔을 것이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서로의 사업 얘기를 꺼린다. 하지만 올해에는 정몽규 회장을 걱정하는 얘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항공 업황이 급전직하하는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해야 하는 정 회장의 처지를 걱정하는 얘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범현대가 어른들이 걱정하는 눈빛으로 정 회장을 위로했다고 한다. 물론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전해 들은 얘기일 뿐이다.

정몽규 회장이 딜레마에 빠졌다. 예정대로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할 것인지, 과감하게 포기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산업은행은 부인하고 있지만, HDC그룹이 이미 양측에 인수 포기 의사를 전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에 관여한 한 인사는 "정몽규 회장이 인수를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70% 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조5천억원을 주고 7천800억원(시가총액)짜리 회사를 사는 것이 합당한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가격이 떨어진 것에 대한 고민이라면 그나마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계기로 미래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는 점은 고민의 부담을 더욱 가중한다. 아시아나항공에 유상증자를 통해 1조4천7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던 계획을 무기한 연기한 것은 그 고민의 깊이가 적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 돈을 넣는 순간 1조6천억원이 채권단의 계좌로 향하게 되고, HDC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후는 모두 정몽규 회장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항공사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각국이 꼭꼭 하늘길을 걸어 잠그면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 운항은 90% 이상이 사라졌다. 아시아나항공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정답을 아는 사람도 없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순간에도 비행장 주차비는 꼬박꼬박 내야하고, 수천억 원의 리스료도 연체 없이 지불해야만 한다. 장사는 못 하는 데 매월 수백억 원의 고정비를 날려야 한다. 은행이나 회사채 시장에서 빌린 돈의 이자도 꼬박꼬박 갚아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알아서 모두 감당해야 한다. 정몽규 회장 입장에서는 "왜?"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비행기를 못 띄우는 게 우리 책임일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그 돈을 들여 사야 하는거지라는 마음도 생길 것이다. 일단 이행보증금으로 낸 2천500억원만 날리고 포기하자고 생각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계약이 파기된 것에 대한 잘잘못은 나중에 법원에서 다퉈 2천500억원 중 일부라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 것이다. HDC 주주들은 그런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 같다.

정몽규 회장이 끝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포기하게 되면 그때부턴 누구의 시간이 될까. 아시아나항공의 주인은 금호산업이다. 하지만 실질 주인은 산업은행이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끝내 무산된다면 대우조선해양의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다시 매각을 추진하겠지만 이 와중에 가능하겠는가.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빌려준 돈의 이자도 못 갚는데 금호산업이 그것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결국 자율협약이든 워크아웃이든 채권단 수중에 들어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주주 감자와 출자 전환을 통해 주인을 산업은행으로 바꾼 뒤 혹독한 구조조정에 돌입할 것이다. 새로운 주인을 찾으려면 화장을 이쁘게 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기간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은 산업은행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을 것이다. 망가진 대우조선을 현대중공업에 팔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혹독한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잘 아는 산업은행은 그런 시나리오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의 임기는 5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강남 아파트보다 나을 수 있다'는 아시아나항공의 새 주인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동걸 회장도 정몽규 회장 못지않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양측 모두 아시아나항공이라는 국적 항공사를 망하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면 조금씩 더 고통 분담을 하는 수밖에 없다. 산업은행은 아시아나항공에 빌려준 1조6천억원의 채무에 대해 만기를 연장해 주고 이자도 낮춰줄 필요가 있다. 기업이 살아야 이자를 낼 돈도 벌 것이 아닌가. 경우에 따라서는 일부 채무를 출자전환해 주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실질적인 자본확충의 효과를 낼 것이고, 재무구조도 좋아질 것이다. 물론 이는 국민의 혈세를 투입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대기업에 대한 특혜로 본다면 다음 스텝으로 나갈 수는 없다. HDC도 그에 상응하고 합당한 고통 분담의 산물을 내놔야 한다. 대주주인 정몽규 회장이 자신의 지분을 담보로라도 내놓는다면 협상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정몽규 회장과 이동걸 회장이 모두 아시아나항공의 회생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시나리오다. 서로 먼 산 쳐다보는 마음이라면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양측이 딜레마에 빠져 고민만 하는 사이에 아시아나항공의 계좌에서는 매일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망친 기업을 살리는 것보다 망하기 직전의 기업을 살리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심사숙고는 길지 않아야 좋다. 빨리 결정을 하자. 무엇이든.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pisces738@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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