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들을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난 7월 14일 정부가 2025년까지 160조원을 투자해 일자리 190만개를 만들겠다는 '한국판 뉴딜'을 선언하자 금융기관들이 이에 화답하고 있다. 4대 금융지주회사들이 밝힌 지원금액이 벌써 수십 조원에 이른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정부의 한마디에 금융기관들이 영혼 없이 달려들어 흉내만 낸다고 꼬집는다. 아울러 한국판 뉴딜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그린 뉴딜'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금융'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그런데 정부가 설명하지 않고, 언론도 지적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한국판 뉴딜의 철학이다. 한국판 뉴딜은 무엇에 상대되는 개념일까?

뉴딜에 상대되는 '올드딜(Old Deal)'은 없었다. 뉴딜의 상대되는 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20년 앞서 내세웠던 '정직한 딜(Square Deal)'이다. 정직한 딜은 미국 중산층을 겨냥한 반면, 뉴딜은 취약계층을 겨냥했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정직한 딜은 20세기 첫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핵심가치로 내세웠던 환경보전, 소비자 보호, 그리고 공정경쟁에 관한 정책들이다. 시어도어는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이었고, 미국인들이 가장 친근하게 생각하는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 때 먼 친척이었던 시어도어를 연상케 하는 뉴딜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름부터 정해 놓은 뉴딜 정책을 어떤 철학으로 채울 것인가는 참모들의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선거참모였던 레이몬드 몰리 교수가 '잊힌 사람(forgotten man)을 위한 정책'으로 채우자고 제안했다.

'잊힌 사람'은 원래 미국의 중산층을 일컫는 말이었다. 대공황보다 50년이나 앞서 예일대학교의 섬너(William Sumner) 교수는 미국의 중산층이 세금을 꼬박꼬박 내면서도 각종 정책에서는 홀대받으므로 잊힌 사람이라고 불렀다. 중산층 보호를 강조한 섬너는 공화당 지지자였고, 민주당 정부의 정직한 딜도 중산층에 호소하는 정책들이었다.

그러므로 민주당 소속 루스벨트가 "사회 저 밑바닥의 잊힌 사람(the forgotten man at the bottom of the economic pyramid)에게 다시 한번 희망을 주자"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공화당이 보기에는 중산층이 아닌 취약계층을 잊힌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궤변이자 기만이었다. 민주당 안에서 경쟁후보였던 흙수저 출신의 앨 스미스가 보기에는 누가 봐도 금수저의 대표 격인 루스벨트가 취약계층 보호를 내세우는 것은 낯간지러운 위선이자 위험한 공약이었다.

어쨌든 1932년 초 루스벨트의 대통령 출마선언은 역사상 처음으로 취약계층 보호를 경제정책의 중심에 세운 혁명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다른 요소들이 좀 섞였다. 경제회복(recovery)과 제도개혁(reform)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민생보호(relief)가 역시 핵심 축이었다.

한국판 뉴딜도 비슷하다. 그것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지난 4월 22일 제5차 비상경제회의였는데, 그때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를 지키는 게 국난극복의 핵심과제이고 가장 절박한 생존문제"라고 말했다. 그 정신은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해서 2025년까지 27조원을 투입하고 34만개 일자리를 창출하는 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다른 2개의 축인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좀 이질적이다. 통상적인 산업정책과 별로 다르지 않다. 총 114조원이 투입되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은 장기 산업정책에 해당하며, 이는 미국의 뉴딜을 크게 넘어선다. 그렇다면 굳이 한국판 뉴딜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을까?

한국판 뉴딜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부르짖던 이름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스마트 뉴딜'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식상하다. 문재인 정부의 장기발전전략을 부각하려면, 차라리 '선도 2025' 정도로 부르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과거 정부의 산업정책들과 뚜렷하게 차별화된다(이명박 정부-토목, 박근혜 정부-지식경제, 문재인 정부-디지털·그린). 미국을 추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웃 나라 중국의 '중국제조 2025'와도 대비된다. 국민들이 이해하기도 훨씬 쉬울 것이다.

산업의 디지털화와친환경·저탄소 환경구축 등이 결코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 장래를 볼 때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을 어떤 철학과 이름으로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서 정책의 집중도와 국민의 호응도는 달라진다.

때로는 형식이 중요하다. 종이를 그냥 던지면 어지럽게 떨어지지만, 몇 번 접어서 던지면 비행기가 되어 날아간다. 떨어지는 것과 날아가는 것의 차이는 형식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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