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21세기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등 전 세계 중앙은행은 통화정책보다 변형된 재정정책 당국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클 것 같다.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뒷전이고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당국이 해야 할 일에도 앞장서고 있어서다.

미 연준은 최근 '유연한 물가목표제(Flexible Form of Average Inflation Targeting)'라는 신박한 통화정책까지 도입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팬데믹(대유행)으로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린 데 이어 상당 기간 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백기 투항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 세계 중앙은행의 포럼인 잭슨홀 연설을 통해 물가가 일정 기간 목표치인 2%를 넘어도 감내하겠다고 선언했다. 금융시장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평균물가목표제' 도입을 사실상 수용한 셈이다. 파월 의장의 발표로 미국 증시 등 위험자산은 빅랠리를 펼치며 환호했다.

일본은행(BOJ)은 팬데믹 이전부터 ETF(Exchange Traded Fund)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일본 증시 등 위험자산을 지지해왔다.

BOJ는 수익률곡선 제어 정책(YCC:Yield Curve Control)까지 도입해 일본 국채 수익률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10년물 기준으로 국채 수익률을 0~0.1%로 묶어두고 있다. 재정적자가 GDP의 250%를 넘어선 일본이 불가피하게 선택한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이다.

유럽중앙은행(ECB)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1조3천500억 유로(약 1천852조6천억원) 규모의 '팬데믹긴급매입프로그램'(PEPP)을 계획대로 계속 집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월 200억 유로(27조4천억 원) 수준의 순자산매입도 계속된다. 올해 말까지 한시적으로 1천200억 유로(164조6천억 원)의 자산을 추가로 매입하기로 했던 방침도 유지됐다.

이른바 '빅 3 중앙은행'들의 유동성 공급은 이미 '헬리콥터 머니' 수준을 넘어섰다. 한 때 '쓰레기 이론' 취급을 받던 ' MMT(Modern Monetary Theory:현대통화이론)'를 세계 중앙은행들이 사실상 수용한 셈이다. MMT는 과도한 인플레이션만 없으면 경기 부양을 위해 화폐를 더 많이 찍어내도 된다는 게 주요 골자다.

이자율이 충분히 낮다면 정부가 적자를 낸다고 우려할 필요도 없다는 게 MMT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이자율만 성장률보다 낮추면 부채비율의 폭발적 증가를 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상 제로금리인 미국·유럽·일본이 대규모 적자재정을 펼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인플레이션이 실종되면서 MMT는 새삼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동성은 무차별적으로 공급됐지만, 인플레이션은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진국 어디에도 수요 견인인플레이션(demand-pull inflation) 압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국제결제은행(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은 코로나 19가 오기 전에 이미 선진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기 위한 긴축적 통화정책을 펼칠 필요가 없다고 진단한 바 있다. BIS는 '필립스곡선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What does the Phillips curve tell?)'라는 보고서를 통해 "선진국을 중심으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상관관계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크게 낮아졌다"고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BIS는 보고서를 통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과 잠재 성장률의 차이를 일컫는 아웃풋 갭(output gap)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의미 없을 정도로 상쇄됐다"고 진단했다.

이 보고서는 평탄해진 필립스 곡선(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상관관계 약화)의 의미는 낮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동시에 만족되면서 통화정책 완화의 여지도 생겼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이 재정의 영역까지 보살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일상이 되고 있다. 20세기형 패러다임에 얽매인 일부 경제학자들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배수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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