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는 그냥 마셔도 좋고, 물을 타서 마셔도 좋고, 얼음을 담가 마셔도 좋습니다." 위스키를 파는 사람들이 선전하는 말이다. 요즈음 비트코인 업계에서도 비슷한 말이 들린다.

"비트코인을 가상통화라고 불러도 좋고, 암호화폐라고 불러도 좋고, 암호자산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가격이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 바람대로 지금 비트코인 가격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때에 개당 3천만 원을 돌파했다.

비트코인 랠리는 2017년 말에도 있었다. 그때는 좀 달랐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아주 강력하게 "비트코인은 화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격이 폭락하자 그 주장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제는 대부분의 투자자가 비트코인이 화폐임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냥 유망한 투자 상품 정도로 보는 것 같다.

비트코인이 화폐냐, 아니냐 그런 건 더는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콜럼버스는 황금의 나라 인도를 꿈꿨지만, 그가 밟은 곳은 인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은 그가 품었던 상상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만일 콜럼버스가 배를 띄우기 전에 인도가 생각보다 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대서양 항해계획을 포기했을 것이다. 이사벨라 여왕이 배를 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케 한 원동력은 결국 무지와 용기였다.

그런데 투자의 세계에서 무지와 용기는 위험하다. 투자의 실체를 모르면 투기 광풍으로 불거졌다가 패닉을 만나 파국으로 끝나기 쉽다. 그래서 비트코인을 비롯한 각종 암호자산 투자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암호자산, 플랫폼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 간의 관계다.

암호자산을 주고받으려면 플랫폼에 접속해야 한다. 그 플랫폼은 주인이 없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애플 등이 제공하는 플랫폼들과 다르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애플이 제공하는 플랫폼들의 목적은 책, 사진, 정보, 음악을 편리하게 유통하는 데 있다. 중요한 사실은, 플랫폼보다 콘텐츠 즉, 책, 사진, 정보, 음악이 훨씬 먼저 존재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은 반대다. 2009년 1월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이 먼저 개발되고, 그 플랫폼을 작동하기 위해 비트코인이라는 피조물을 만들었다. 그 플랫폼은 주인이 없다지만 최초의 개발자(사토시 나카모토)가 주인 행세를 하며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1천800만 개의 비트코인은 디지털 아담과 이브에서 파생된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비트코인 플랫폼은 탈중앙화(decentralized)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사토시 나카모토를 조물주로 인정하는, 지독하게 중앙화된 세계다.

다른 암호자산들도 원리는 대개 비슷하다. 먼저 플랫폼을 개발한 뒤 그 플랫폼에서 거래하기 위해 매매의 목적물을 탑재했다. 아마존, 페이스북, 구글, 애플과 같은 회사가 먼저 설립되고 그 회사들이 플랫폼 사업을 위해 책, 사진, 정보, 음악을 발명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인과관계의 지독한 역전이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인과관계가 어쨌든 지금, 이 순간 희소 자산으로서 비트코인의 잠재력만 충분하면 그만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뒤집으면 비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활주로는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활주로에 있는 것이 전부 비행기는 아니다. 활주로 위를 기어가는 거북이가 비행기라고 믿고, 거북이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렸다가는 낭패한다. 활주로는 플랫폼이고 거북이는 암호자산이라고 생각해 보라.

1970년대 말 백남준은 소니 캠코더와 TV 브라운관을 이용해서 비디오 아트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다. 하지만 지금 소니 캠코더와 TV 브라운관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도 영상 기록장치와 재생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다른 형태로 진화되어 있다.

기록을 다루는 블록체인 기술도 그런 과정을 밟을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일단 암호자산이라는 형태로 상품화되었지만, 그것은 첫 번째 존재 양식일 뿐이다. 먼 훗날에는 암호자산이라는 겉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과 쓰임새로 존재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위스키는 그냥 마셔도 좋고, 물을 타서 마셔도 좋고, 얼음을 담가 마셔도 좋다. 위스키라는 실체를 안다면, 그것을 어떻게 즐기는지는 취향의 문제다. 암호자산도 마찬가지다. 블록체인 기술, 플랫폼 그리고 암호자산의 관계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암호자산 랠리를 즐기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암호자산에 투자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 좋다.

활주로 위의 거북이가 과연 날 수 있는지를.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노미스마(nomisma)'는 그리스어로 화폐와 명령(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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