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2020.12.24 vs 2020.12.30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 같은 두 날짜는 훗날 금융의 역사를 바꾼 날들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앞은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를 전격 타결한 날이고 뒤는 EU와 중국이 투자협정을 체결한 날이어서다.

브렉시트는 반무역, 반이민, 반세계화로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반면 7년을 끌어온 EU와 중국의 투자협정 체결은 교류 협력 강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어 보인다. 세계 최대의 단일 경제권과 수출국의 개방과 협력 강화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성문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면 EU와 중국은 길을 낸 셈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영국, EU, 중국 등이 각자의 셈법으로 결별과 협력을 선택했겠지만, 그 기저에 디플레이션의 망령이라는 더 큰 그림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디플레이션 따른 일자리 부족이 브렉시트 방아쇠

당초 4년전 브렉시트가 거론될 당시에는 실행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라는 명성을 가진 영국 국민들이 경제에 타격을 줄 수도 있는 EU 탈퇴에 찬성할 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반이민 정서 등을 바탕으로 영국민들은 EU와 결별하기를 원했다.

일어날 가능성이 크지 않아 블랙스완 같았던 브렉시트 결행의 방아쇠를 당긴 건 디플레이션 등에 따른 일자리 부족이었다. 영국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에서 촉발된 디플레이션의 망령에 시달려왔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영국은 금융산업의 고전에 따른 경기 부진에다 저유가까지 겹쳐 투자 부진과 일자리 감소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셰일가스 혁명 등이 촉발한 저유가는 산유국인 영국의 일자리를 더 가파른 속도로 구축한 것으로 풀이됐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수준 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영국의 디플레이션 압력은 더 가중됐다. 영국민들은 이를 별다른 장벽 없이 유입된 EU의 노동력 탓으로 여겼다.

◇디플레이션 수출 경쟁에 뒤처진 EU와 중국의 노림수

인류의 모든 활동을 멈춰 세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은 세계 각국의 전방위적인 디플레이션 수출 경쟁으로 이어졌다. 각국 중앙은행은 유효수요 확보를 위해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 혹은 마이너스 영역으로 앞다퉈 낮췄다.'나부터 살고보자식'의 환율 전쟁을 통해 디플레이션을 수출하려는 시도가 더 격렬해진 결과다.

세계 최대의 수출국 가운데 하나인 중국도 디플레이션의 망령에 잡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등 예외가 아니다. 이달 초에 발표된 중국의 11월 소비자물가(CPI)가 전년 대비 0.5% 떨어져 2009년 10월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하락세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11월 근원 CPI는 전년 대비 0.5% 상승했다. 인민은행(PBOC) 지난해 같은 기간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탓에 급등했던 돼지고깃값이 하락한 데 따른 기저효과라며 근원물가를 주목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오히려 고르지 못한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농민공 등 이주노동자의 소득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서다. 당연히 가계의 소비지출도 아직은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벌써 거론되고 있는 출구전략까지 모색될 경우 경기부진 속에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네이션 상황까지 내몰릴 수도 있다.

유로존도 유로화 강세 등에 따른 디플레이션 압력에 노출돼 있다. 유로화는 지난 3월23일 장중 한때 유로당 1.06340달러를 기록하는 등 저점을 찍은 뒤 30일 한 때 1.23095달러로 고점을 찍었다. 9개월 사이에 16% 가까이 폭등한 셈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기회가 될 때마다 유로화 강세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으며 구두 개입에 나섰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통화정책을 너무 화끈하게 완화하고 있어서다. 유동성 공급 및 환율 절하 형태의 디플레이션을 수출하는 경쟁에서는 연준이 글로벌 최강이라는 의미다. 덕분에 내년부터는 미국에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강도의 인플레이션이 관측될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유로존과 중국은 미국처럼 무지막지하게 유동성을 푸는 방법으로 디플레이션을 수출할 처지가 아니다. 미국이 마뜩잖아하는 표정이 역력한 가운데 조 바이든 정권이 출범하기 전인 연말에 서둘러 투자협정을 전력 타결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유동성 증가가 아니라면 가계의 가처분 소득 증가가 디플레이션 타개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가 주창한 비교우위론이 아니라도 교류 증진은 언제나 인류 복리 증진의 지름길이었다.

자본주의와 경제학의 종주국인 영국은 브렉시트로 성을 쌓고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는 중국은 투자협정을 통해 유로존(서역)으로 향하는 길을 냈다.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투자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대목인 듯하다. (배수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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