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지난달 11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면서 개장을 알리는 오프닝 벨을 울린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한강의 기적'을 언급했다. CN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1960년대 1인당 국내총생산(GDP) 79달러의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이제는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그러면서 쿠팡의 NYSE 상장은 한국의 성공 스토리의 증거라고도 했다. 오프닝 벨을 울리는 자리에는 태극기가 미국 성조기와 함께 준비돼 있었고, NYSE 정문 앞에는 대형 태극기도 걸렸다. 미국과 한국의 언론들은 한국의 유니콘이 100조원의 기업가치를 받는 기업으로 성장한 스토리를 전하기에 바빴다. 김범석 의장의 말처럼 쿠팡은 과거 한강의 기적을 다시 한번 일궈낸 한국 스타트업의 성공 신화로 예쁘게 포장됐다. 100조원이라는 돈의 무게는 그만큼 무거웠다.

NYSE에 상장한 쿠팡은 한국에 영업장을 둔 쿠팡코리아가 아닌 사실상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본사를 둔 쿠팡INC(쿠팡LLC)다. 김범석 의장은 쿠팡INC 지분 10.2%를 보유한 3대 주주이지만, 이사회 주요 경영사항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76.7%의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김범석 의장은 미국인이다. 해외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외에서 생활하고,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그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명백히 미국 국적이다. 그래서 그를 두고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고 한다. 그가 지배하는 기업도 미국 법인이다. 그가 한강의 기적을 얘기하고, 한국의 성공 스토리를 언급했더라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쿠팡INC가 지배하는 쿠팡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13조원을 넘어섰다. 해외 진출이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대부분은 한국에서의 영업을 통해 창출됐다. 쿠팡INC가 곧 쿠팡코리아인 셈이다. 쿠팡코리아는 한국 법인이다. 어찌 보면 미국 국적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배구조가 이런 식으로 된 것은 기업 경영 또는 주주간 편의성 등을 고려한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자산 총액 5조원을 넘어서 올해 처음으로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는 쿠팡의 총수(동일인)를 누구로 지정할지를 두고서는 논란이 뜨겁다. 총수를 지정하는 공정거래위원회는 갈지자 행보로 논란을 부추겼다.

공정위는 매년 4월 말 자산 총액 5조원 이상인 기업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해 발표한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집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연인 또는 법인을 총수로 지정한다.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면 계열사 현황은 물론, 내부거래 내역 등의 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총수로 지정된 자는 배우자는 물론, 6촌 이내 혈족과 4촌 이내 인척 등이 보유한 계열사 현황과 거래 내역 등도 공시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제재를 받고 때에 따라 검찰에 고발돼 조사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인인 김범석 의장을 총수로 지정해도 되는지를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 공정위는 그간 외국 국적자를 총수로 지정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김범석 의장이 아닌 쿠팡 법인을 총수로 지정하는 것을 검토했다. 그러다 '검은 머리 외국인'에 대한 과도한 특혜라는 지적이 일자 방향을 틀어 김범석 의장을 총수로 지정하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정거래법 어디에도 총수를 지정할 때 국적을 고려하는 조항은 없다. 쿠팡의 실질 지배력을 가진 자는 의결권 76.7%를 보유한 김범석 의장이다. 그가 미국인이라고 해서 별도의 특혜를 줘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공정위는 참 많은 고려를 한 듯 보인다. 일각에서는 미국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의 최혜국 대우 위반이라는 논리를 들이대고 있다. 사우디 왕족 일가가 대주주인 아람코가 지배하는 에쓰오일의 총수는 법인으로 지정하면서 미국 기업 쿠팡의 총수는 개인으로 지정하면 차별에 해당돼 통상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는 논거다. 하지만 사우디 왕족의 특정 개인이 아람코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김범석 의장과는 사례 자체가 다르다.

공정위의 대기업집단과 총수 지정을 두고 쿠팡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공정위에 어떤 의견을 제출했는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물론 김범석 의장의 총수 지정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얘기는 흘러나온다. 사실 경쟁 당국의 규제 틀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할 기업은 없다. 하지만, 자산 총액 5조원 이상 국내 기업들에 모두 적용되는 규제를 쿠팡에 예외를 두어야 할 이유는 없다. 혁신의 기운을 꺾는다는 지적에도 동의할 수 없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이해진 창업자와 김범수 의장이 총수로 지정됐다고 혁신적인 기업 활동이 꺾였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공정위는 원칙대로 하면 될 일이다. 굳이 논란을 자초할 일이 아님에도 논란이 벌어진 것은 공정위 스스로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쿠팡과 김범석 의장도 원칙대로 따르면 된다. 상장 세레모니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마케팅'이 그저 장삿속이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차후 미국인 주주들을 앞세워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13조원의 매출을 내고 쿠팡을 100조원의 기업가치로 만들어 준 것은 한국인들이다. 필요할 때만 미국인으로 변신하는 요술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기업의 지속가능성은 꼼수가 아닌 진정성에서 출발한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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