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미 한화투자증권 부장>



<편집자주: 유리천장.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뚫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융시장도 4대 은행에 여성임원이 없을 만큼 두껍기로 소문난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고 상위 1%로 우뚝 선 여성 금융인들을 만나봤다. 신입사원 시절 조그만 실수에도 주눅이 들고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직원이 실력파 임원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리천장 아래서 연약한 꽃으로 남기보다 이를 뚫고 큰 나무가 되는 쪽을 택한 베테랑 여성 금융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영 기자 = 작년 8월초. 코스피가 폭락하자 윤향미 부장은 관리하던 주식형펀드를 전량 환매했다.

하루만에 200억원. 대규모 펀드 환매에 놀란 자산운용사에서 전화가 왔다. 환매 의사를 재확인하는 담당자에게 팔겠다고 했다. 주가가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

"고객께 조금 쉬시는게 좋겠다고 했어요. 8월말에 다시 들어갔어요. 바닥에서 사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수익률은 유지할 수 있었죠"

미국 더블딥(이중침체) 우려와 유럽 재정위기 여파, 미국 신용등급 강등까지 겹치며 증시는 추락했다. 2100대였던 코스피는 1,600대까지 미끄러졌다.

"주가 폭락으로 100억원에 약 5천만원 손실을 봤어요. 적은 돈은 아니지만 5% 빠졌을 때 환매를 못하면 50% 빠질 때까지도 못해요. 손실은 보지 말아야 합니다"

젊고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칼 같은 손절매 원칙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영업 실적 1위. 탄탄한 고객수익률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그는 올해 한화증권이 야심차게 추진중인 PB(프라이빗뱅크)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1993년도에 입사한 후 국민투자신탁, 현대투자신탁, 푸르덴셜 투자증권, 한화투자증권까지 사명이 네 번 바뀔 동안 그는 영업의 달인으로 탄탄히 자리를 잡았다.

평균적으로 관리하는 개인자산만 총 600~700억원. 법인자산까지 합치면 그 이상이다. 한화증권에서 유일한 '마스터 PB' 윤향미 부장을 만나봤다.

▲아가씨는 한 달에 얼마 받아? = 신입사원에게는 자리가 없었다. 매일 동기 3명과 함께 친절히 모시겠다는 문구가 적힌 미스코리아 띠를 두르고 인사를 했다. 그 중에서 윤 부장은 차 담당이었다.

어느 날 지점 식당 아주머니가 윤부장을 조용히 불렀다. 매일같이 차를 나르는 모습을 눈여겨 봐둔 모양이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차 타주고 한 달에 얼마 받아?"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한국투자신탁, 대한투자신탁, 국민투자신탁 3개사가 주름잡던 시절, 대학에서 상위권 성적을 받고 입사한 터라 금융업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던 만큼 충격도 컸다.

상사를 찾아가 자리를 달라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인 '자리주삼(자리 주세요)'을 외친 셈이다. 신출내기 막내 직원의 당돌한 요구에 상사는 웃음을 지으며 창구에 자리를 마련해줬다. 실전에서 배워보라는 상사의 조치였으나 기분이 날아갈 듯했던 윤 부장. 그러나 고객을 대면하면서 또 한 번 정신이 번뜩 들었다.

금융상품도 차와 같이 고객마다 취향이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차를 타면서 '주는 대로 마시지'라고 구시렁댔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차 타는 거 괜히 시키는 허드렛일이 아니에요. 고객마다 취향을 고려해 커피, 유자차, 한방차 따로 드리듯 금융상품도 고객마다 상담이 달라져야죠"

▲친절해서 찾는 게 아니다 = 신입사원 시절 무조건 고객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믿었다. 너도나도 CS(고객서비스)를 강조했으니 친절한 직원이 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요즘 윤 부장의 생각은 다르다. 고객은 친절의 대가로 금융회사를 찾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고객은 친절함을 원해서 금융회사 직원에게 놀러오는 것이 아니에요. 자산관리를 받으려고 오는 거죠. 친절해서 찾는게 아니라 필요해서 찾아야 진짜 영업이 가능한 겁니다"

내 돈 내가며 친절을 사려고 오는 고객이 얼마나 되겠는가. 윤 부장은 그 점에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의 자산관리 첫 번째 원칙은 이렇다. '고객이 밤잠을 설치지 않게 하라'.

"매일 꾸준히 수익을 내는 게 중요하지 오르락내리락 하면 고객이 불안하죠. 전일 미국 증시가 많이 빠졌더라도 알아서 해줄 거라는 믿음. 그게 중요합니다"

그는 상품 설명보다 금융시장 설명에 더욱 공을 들인다. 전세계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지금 고객은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는 것인지, 앞으로 봐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꼼꼼히 알려준다.

"시장을 아는 고객은 무슨 일이 터져도 차분하게 대처해요. 그만큼 리스크 감내 수준도, 투자 성향도 다릅니다"

▲'中 지준율' 아는 할머니 = "당장 손해를 봤는데 곧 올라갈 테니 기다리라는 증권사 직원의 말, 믿을 수 있으세요?"

윤 부장은 이렇게 물었다. 그는 이런 말 대신 경제상황이 어떤지를 설명해준다. 고객의 시야를 넓혀주면 그만큼 고객이 마음 편히 자산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최근 여의도의 한 할머니 고객이 전화를 해왔다.

"내가 말야. 뉴스에 나오는 지준율을 알아듣고 남편에게 설명을 해줬어"

할머니 고객은 중국의 지급준비율 인하 뉴스에 귀를 기울이다 윤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시장 흐름을 읽고 본인의 펀드는 괜찮다고 판단하는 박식한 할머니다.

윤 부장은 한 번 고객이 올 때마다 시장에 대해 쉽게 풀어서 알려준다. 그러다 보니 1~2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그 덕에 윤 부장의 고객들은 시장을 읽는 눈도 남다르다.

▲10년 고객, 구별해라 = 윤 부장의 첫 근무지는 방배지점이었다. 그때부터 함께 지내 온 고객은 벌써 19년 고객인 셈이다. 현재 맡은 고객도 최소 거래 기간이 10년이다.

"투자 기간이 길수록, 경험이 많을수록 분명 손실 구간이 있었을거에요. 그럴 때마다 잘 피하지 못했다면 명이 짧아져서 못살아요"

그의 고객은 대부분 30억원대 이상이며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한 고객도 많다. 이런 돈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오랜 기간 자산을 맡기는 건 왜일까. 영업 비결을 물었다.

첫 번째가 타게팅이다. 윤 부장은 "신규 고객을 맡을 때 구체적으로 뭐가 필요한지 잘 구별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자산이 1억원인 고객은 현금 가치가 올라가길 원하지만 100억원 이상인 고객은 절세, 증여에 더 관심이 많다.

"세법, 부동산에 대한 공부는 필수에요. 종합소득세가 얼마나 나오냐고 묻는 고객앞에서 계산도 제대로 못하면 안되니까"

두 번째는 꼼꼼한 설명이다. 그는 글로벌 시장 흐름을 모르는 고객에게 상품 설명만 해줘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시장에서는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게 해줘야 해요. 그래야 손실이 났을 때도 어떻게 할지 고객 스스로 판단할 수 있죠"

▲주가 빠진 날은 통화중 = 주가는 인정사정없다. 항상 좋을 수는 없는 법.

수익을 냈을 때보다 손실이 났을 때 자산 관리를 하는 입장에서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꽤 불편한 일이다. 그럴 때 윤 부장은 수화기를 든다.

"부담되더라도 기분 안좋은 전화를 받기 전에 미리 전화를 드려요. 주가가 많이 빠졌다는 전화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에 통화할 때는 좀 낫잖아요"

오히려 주가 빠져서 힘들겠다고 윤 부장을 걱정해주는 고객들도 많다.

"하기 싫은 일은 일단 강제로라도 하는 편입니다. 달력에 아예 적어버리죠"

외환위기, 금융위기, 유럽 채무위기의 폭풍을 겪으면서도 오랜 시간 고객을 유지해 온 또 다른 비결인 셈이다.

지금까지 일을 재미있게 하고 있는 것은 이런 성격 덕분이기도 하다. 스트레스 받을 때는 일단 부딪쳐서 해결하고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라는 윤 부장.

"골치아픈 일이 생기면 너무 졸려요. 한 숨 자면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현재 한화증권 강남본부 지점장인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단순해서 참 좋겠다"

▲고객과 함께 늙어가기 = 회사명이 푸르덴셜 투자증권이었을 때 윤 부장은 유럽, 미국의 부티끄(boutique)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부티끄는 소수의 전문가가 모여 금융 상품이나 투자 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 전문 회사를 말한다.

뉴욕의 한 부티끄에서 만난 전문가는 70대 할머니였다. 고객층도 대부분 70대라고 했다. 무려 40년간 금융전문회사를 운영해 온 그 할머니PB는 지금도 윤 부장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해외에는 50~60대 PB들도 많잖아요. 긴 세월 동안 자산 관리를 하는 직업인으로서 고객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 가장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셀러가 아닌 바이어 = 최근에는 마스터PB라는 중책을 맡은 윤 부장은 프리마스터PB 10~15명, 그외 후배 직원들까지 총괄하고 있다. 요즘은 자꾸 후배들이 눈에 밟힌다고 한다.

"후배들에게 금융 상품을 파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바이어가 되라고 해요. 고객의 마음을 사는거죠. 그래야 영업이 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마음을 살 수 있을까. 윤 부장은 금융 시장에 대한 지식은 물론 고객의 눈빛, 관심사에도 빠르게 반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역시 과거 영업을 잘하는 선배 직원이 상담을 하면 옆방에서 들으면서 배우고, 각종 세미나도 열심히 뛰어다녔다. 요즘도 부동산, 세법을 익히고 글로벌 금융시장 정보에 항상 귀를 기울인다.

"많이 알아야 고객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어요. 물론 공부만 한다고 영업이 되는 건 아니고 고객의 관심사도 잘 눈치채야 해요.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에게 마이너스를 안겨주지 않는 것입니다"



윤향미 부장은 지난 1993년 한화증권(당시 국민투자신탁)에 입사해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종로지점에서 근무했다. 현재 여의도지점에서 마스터PB로 PB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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