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금융인에게 '말(言)'은 곧 '신뢰'다.

금융인들은 '몹시 까불어 가볍고 점잖지 못하다'라는 의미의 `방정맞다'는 말을 누구보다도 듣기 싫어한다. 말 한 마디에 사람(기업)이 죽고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금융권 최대 이슈로 STX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구조조정이 떠올랐다.

재계 13위의 대기업그룹의 유동성 문제는 비단 금융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STX그룹의 사업 기반인 부산과 진해에 있는 수만명에 달하는 직원과 가족, 협력사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수많은 소액주주들도 하루하루 요동치는 주가에 한숨을 내뱉고 있다.

그야말로 방정맞지 않게 매우 세심하고 정밀하게 다뤄져야 할 사안이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STX그룹 핵심 계열사인 STX조선해양을 자율협약 대상으로 올려 놓고 경영정상화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유동성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계열사들도 테이블 위에 쭉 펼쳐 놓고 들여다 보고 있다.

산은은 경영지원단도 만들어 행내 전문 인력들도 죄다 모아놨다.

하지만 취재하는 기자들도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철통보안 때문이다.

한 대기업그룹의 미래를 다시 리스트럭처링 하는 일이고, 폭풍맞은 파도처럼 주가가 연일 요동치니 당연한 조치다.

그간 수많은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경영정상화 계획을 세워 본 산은 입장에서는 일종의 노하우라 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산은의 수장인 홍기택 회장의 최근 몇몇 발언들에 대해 금융권에서 말이나오고 있다.

홍 회장은 지난 1일 국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STX조선의 실사가 끝나는 6∼7주 뒤 감자후 출자전환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감자후 출자전환은 기업 구조조정에서 흔히 있는 과정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 6천억원에 달하는 긴급자금도 대 줬으니 예견된 조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느닷없다는 게 주변의 반응이다. 아직 경영정상화 계획조차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감자후 출자전환, 즉, 회사의 주인이 바뀐다는 것을 시사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감자로 소액주주들의 주주권은 날아갈 수도 있다. 보유중인 주식이 6~7주뒤엔 모두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다.

한 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채권은행의 수장이 이미 칼을 휘둘러 버린 셈이다.

그것도 '피하는 게 상책인 사람들'이라던 기자에게 선물 주듯이 툭 내뱉고 말았다.

소액주주들은 감자전에 주식을 던질 것이고 주가는 또 요동칠 것이다.

회사의 미래를 불안하게 여긴 STX조선의 수많은 젊은 핵심 인력들의 이탈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홍 회장은 "STX조선을 사겠다고 나설 곳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말도 남겼다. 홍 회장의 말을 받은 산은 관계자는 "대우조선에 위탁경영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고도 했다.

수년째 팔지 못하고 처치 곤란한 상황에 빠진 대우조선에 STX조선을 맡긴다는 데 대해 업계에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게다가 하루전 홍 회장은 또 다른 국내 신문과의 인터뷰에선 대우조선을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앞뒤가 안맞는 얘기다.

홍 회장의 구설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책금융기능 재편에 대해서도 시장의 오해를 부를 만한 발언을 내놨기 때문이다.

산은 민영화가 무산됐으니 정책금융 업무를 정책금융공사가 하면 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책금융공사의 규모와 역량이 산은에 못미친다"고 잘라 말했다.

정책금융공사 인원이 400명으로 산은의 2천900명에 못 미치니 능력도 안된다는 얘기다. 홍기택식 '쪽수의 경제론'이다.

산은지주 지분을 90% 넘게 보유하고 있어 '실효적 지배' 관계에 있는 정책금융공사에서는 '경제학자답다'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지고 있다.

강의실에서 쏟아내는 말들이 모두 지식이 될 수는 있겠지만,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금융가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다.

STX그룹의 운명을 가를 산은의 처분을 모두가 목빼고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홍기택 회장은 5일부터 대통령 방미일정에 동행한다.

pisces73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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