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나랏돈을 만지는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에 외국인을 영입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 영국 중앙은행 총재가 된 마크 카니의 국적은 캐나다고, 최근 인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된 라구람 라잔의 국적은 미국이다. 라잔 총재는 인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시절 이후엔 줄곧 미국에서 살았다. 외부에서 총재를 데려온 전례가 없는 인도가 외국 국적 보유자를 영입하자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 인도는 매우 경직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명문 네루-간디 가문 출신인 소냐 간디가 총선에 이겼음에도 이탈리아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총리직을 맡지 못했다.

'외국인 중앙은행 총재'는 세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글로벌 트렌드다. 첫째, 능력 있으면 국적을 불문하고 중앙은행 총재로 영입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 둘째, 중앙은행 총재의 임무가 구원투수 역할에 점점 치우치고 있다. 셋째, 그런 측면에서 보면 두 외국인 중앙은행 총재들은 이른바 '버냉키의 아바타'들인 셈이다.



◆통화정책의 선구자 '마크 카니'

카니와 라잔은 자기 영역에서 확실하게 자리 매김을 한 전문가다. 둘 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측력이 뛰어나다. 카니는 영국에 오기 전 캐나다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다(2008년 2월~2013년 6월). 그는 취임한 지 한 달 만에(2008년 3월) 과감하게 금리를 내리고 선제적으로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썼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올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그 덕분에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전 세계가 금융위기를 겪을 때 캐나다는 멀쩡했다. G20(주요 20개국) 중에서 가장 먼저 경기회복을 이뤄낸 나라도 캐나다였다. 이런 공적에 힘입어 카니는 유로머니지가 뽑은 '2012년 최고의 중앙은행 총재'에 선정됐다.

카니는 통화정책의 선구자 역할도 했다. 그는 캐나다중앙은행 총재를 지낼 때 포워드 가이던스(선제 안내)라는 정책 프레임을 만들었다. 포워드 가이던스는 시장에 정책의 밑그림을 미리 알려줌으로써 시장참가자들이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지침을 주는 것이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만든 '출구전략 시간표'는 사실 카니의 포워드 가이던스를 본뜬 것이다. 카니가 영국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하고 제일 처음 만든 작품도 역시 포워드 가이던스다. 그는 실업률 7%가 될 때까지 현재의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선제지침을 발표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할지를 놓고 고심중이다.



◆유능한 중앙은행 총재는 스카우트될 수 있다

라잔은 '그린스펀 저격수'로 유명해졌고 미국의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해 명성을 얻었다. 앨런 그린스펀 연준 총재가 퇴임을 앞둔 2005년, 라잔은 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보고서를 냈다. 라잔은 "금융의 발전이 세계를 더 위험하게 했나"라는 보고서에서 미래에 다가올 (금융)재앙의 주범은 그린스펀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저금리 체제에서 독버섯처럼 퍼진 금융파생상품의 위험성을 폭로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의 뷰(전망)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뭇매를 맞는다. 최근 연준 의장 후보로 주목받는 로런스 서머스는 당시 라잔을 향해 촌스러운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의미로 '러다이트(Luddite. 신기술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만 하는 사람)'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고 그는 족집게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무도 라잔의 생각을 반박하지 못한다"고 치켜세웠다. 라잔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받은 '인사이드 잡'에도 출연해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카니와 라잔의 공통점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고, 소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단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유능한 능력은 중앙은행 총재도 스카우트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긴 원동력이다.



◆소방수 역할 굳어지는 중앙은행 총재

과거 중앙은행 총재는 물가와 고용을 두루 살피면서 통화량과 금리를 조절하는 코디네이터였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 이후 총재의 역할이 변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최전선에서 싸우는 사령관이며 화재가 나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불을 끄는 소방수다.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미국발 금융위기 때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돈을 풀어내 경제위기를 진정시킨 게 큰 전환점이 됐다.

인도가 라잔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한 것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경제성장률 둔화 ▲외환위기 우려를 자아내는 경상적자 ▲재정적자 불안▲10%가 넘는 인플레이션 ▲루피아 폭락 등 5대 중병을 치료하기 위해 외국의 명의(名醫)를 모셔온 셈이다.

인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해외자본 유입이 필수적이다. 경상적자를 메우고 루피화 폭락을 진정시켜야만 경제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인도 사회가 미국 국적의 라잔을 영입한 건 해외자본을 당기기 위한 '얼굴마담' 역할을 기대한 측면도 있다.

라잔의 취임 일성은 낙관적이다. 인도는 위기를 극복할 저력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의 회복을 자신한다고 했다. 라잔은 스스로 친성장 정책론자임을 강조하고 루피화 가치를 지켜낼 것을 공언하고 있다. 그가 대외신인도를 발판으로 소방수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 총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그는 인도의 정치권과 공무원 등 관료집단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과제도 동시에 안고 있다. 이는 그가 미국 금융위기를 놓고 석학들과 논쟁을 벌일 때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될지 모른다. 외국 국적을 가진 라잔은 비주류인 타밀족 출신이어서 인도 국내에 우군이 많지 않다. 정책 집행과 비판은 다른 영역이라는 점에서 분석가인 라잔이 어떤 정책집행 능력을 보일지도 지켜봐야 한다.

한편, 물가와 고용이라는 두 개 목표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았던 통화정책의 무게 추는 고용으로 확 기울었다. 이쯤 되면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영국의 카니는 중앙은행의 두 가지 목표인 고용과 물가 중에서 고용을 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했다. 실업률 기준 7%를 명시적으로 못박은 것은 그 증거다. 이는 영국 중앙은행 전통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이다. 고용보다 물가를 중시하던 영국 중앙은행 직원들은 카니의 급진적인 개혁이 낯설다. 그러나 카니의 의도는 명확하다.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중앙은행의 돈줄 조이기는 없다는 점을 시장에 명확히 천명한 것이다.

(국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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