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전·월세난이 단순히 주택 수급상의 임차인과 임대인들만의 문제일까. 과연 임대·차인들에게 예측 가능한 가격 환경만 조성하면 적정 시장가격이 회복될까.

최근 시중은행 부행장을 지내다가 올해 그만둔 A씨를 만났다. 직장에서 잘린 이후 그는 재취업을 모색하면서 '신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부행장 정도 지낸 사람이 그런 생뚱맞은 걱정을 하느냐고 핀잔을 줬더니 그의 설명은 착잡했다.

퇴직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평소에 생각은 했지만, 부행장 재직 동안은 바쁜 업무와 일상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쫓겨 대비할 틈이 없었다. 퇴직금 일부를 은행에 넣어뒀지만, 이자만으로는 대학 3년생 자녀의 학비와 용돈 대는 데도 허덕인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소위 '별'을 단 잘 나갔던 자신이 절벽으로 떨어질 지경이라면 다른 계층은 오죽하겠느냐고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우리나라의 중산층들도 '이자소득자들의 안락사'(euthanasia of the rentier)에 직면하고, 모든 자산가격의 수익률이 추락하면서 '저수익의 지옥'(purgatory of low returns)에 허덕이고 있다.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몸은 아직도 청춘인 이들의 재취업 일자리 부족이다. 퇴직 이후 할 일은 비정규직뿐이지만 마땅한 자리 찾기도 어렵다. 100세 시대에 돈 나갈 곳은 진행형인 데 수입은 없어지고 신분도 불안정하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생길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최루의 보루인 살고있는 아파트는 중요한 재테크의 대상이다. 당연히 시중은행 이자보다 못한 전세금보다 월세금에 시선이 꽂히지 않을 수 없다. 전세 품귀 속에 월세가 치솟는 배경이다.

경제주체들은 가격(Price)에 재정거래(Arbitrage) 기회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전·월세난은 '이자소득 안락사'와 '저수익의 지옥'이라는 환경 속에, 미래에 대한 실존적 불안감이 더해지면서 증폭된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퇴직 이후의 절벽을 맞게 되는 중산층과 베이비붐 세대들이 기업과 정부에게 외면당하자 각자 살길을 찾아야하는 전대미문의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고,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내몰린 이들은 사회에 대해 갖고 있던 신뢰를 접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협업과 분업이 기본적으로 갖춰지고, 생산수단과 금융이 작동해야 돌아가는 체제인데, 분업은 고도화되지만 신뢰붕괴 때문에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협업 체제가 망가질 위험이 커지고 있다.

따라서 정부 입장에서는 현재 추진하는 고용률 70%도 중요하지만, 중산층과 베이비부머들의 은퇴 프로그램 정비가 시급하다. 최근 정부의 세제 개편안에 대해 중산층이 반발하는 이유도 이런 심리적 배경이있다. 그들에게는 한마디로 복지도 좋지만 '은퇴 이후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정부가 내 주머니 털어갈 생각만 한다'는 분노가 깔렸다.

전ㆍ월세 난의 배경은 결국 퇴직 이후의 실업과 비정규직화, 사업실패, 생활고 등 때문에 저소득층으로 떨어지는 숫자가 매년 증가하는 상황에서는 해법이 쉽지 않은 구조적인 문제인 셈이다.

(취재본부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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