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비자금(秘資金)'이라는 말의 역사는 국내에선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특히 정치권이나 오너가 있는 대기업에서 불법적으로 정치자금과 사적인 지출, 혹은 로비활동에 쓰기 위한 자금을 통칭한다.

기록상으로는 1987년 범양상선의 불법적인 외화유출 사건에 대한 국세청의 발표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라고 한다. 무역이나 계약 등 거래에서 관습적으로 발생하는 리베이트나 커미션, 회계처리를 조작하여 발생한 부정한 돈에 대해 세금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특별히 관리한다.

외국 기업에도 비자금 개념은 있다. `침전된 자금'(Watered stock)이라는 계정도 있고, 주로 정치자금 조성을 위한 것이 목적이다.

요즘 특히 비자금 관련 사건들이 많아졌다. 가까이는 지난 12일 사임한 이석채 KT 회장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고, 효성그룹, CJ그룹, 현대그룹 등이 같은 혐의로 수사가 진행 중이다. 또 지난 9월엔 검찰이 `전두환 비자금'을 포착해 동아원을 압수수색하기도 했고, 수년 전엔 전직 임원이 삼성그룹의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상당수 기업이 크고 작은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실 `비자금'의 유혹은 달콤하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조선과 고려시대 왕들도 이 비자금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왕권의 힘을 좌우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은 내수사(內需司)라는 곳이었다. 이 기구는 왕의 재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했고, 왕의 사유재산은 내수사에서 사채놀이와 땅의 개간을 통해 규모가 커졌다. 이 자금은 왕실의 경조사는 물론 신하들의 상금, 나라에 재난이 닥칠 때 기부하는 내탕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로 정부 예산이 아니고 왕의 사적인 지출에 이용됐기 때문에 비자금 조성이 필수적이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비자금의 `비밀스러운 유용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번 국민은행의 도쿄지점 비자금 조성설은 오너가 있는 사기업이나 정치인 비자금 조성이 아닌, 공공적 성격을 가진 금융기관의 경우라서 파장이 큰 모양새다.

은행들이 감독당국을 피해 해외지점을 통한 불법적 탈세와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에 관련 업계는 이번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은 은행의 해외지점들을 검사할 예정이다. 은행뿐 아니라 증권사 등으로 범위가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당국이 이번 기회에 금융회사들의 비자금과 관련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과연 금융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길래, 특정 오너도 없이 공적인 기능을 갖는 기관에서 비자금이 필요한 건지에 대한 국민적 궁금증은 어떻게 풀 것인지가 문제다. (산업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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