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테이블 위에 세 개의 컵이 있다. 각 컵에는 비닐 호스가 연결돼 물이 계속 주입되고 있다. A는 물이 다 차서 넘치려 하고 B는 절반, C는 ¼ 정도 차 있다. 마술사는 모든 컵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슬기롭게 막아내야 한다. 관중들은 물이 막 넘치려는 A를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다. B와 C는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물이 넘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 변수에 적용할 수 있다. A는 테이퍼링, B는 실업률, C는 인플레이션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 A는 이미 넘쳐흘렀다. 연준의 테이퍼링은 타이밍의 문제였을 뿐, 언젠가는 시작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실업률의 컵 B는 아직 여유가 있다. 그런데 계속 물이 주입되고 있으므로 남은 절반의 컵도 가득 차는 건 시간문제다. 인플레이션의 컵 C는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한다. 물이 채워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관중들은 A만 쳐다봤다. 그러다가 얼마전부터 B도 쳐다보기 시작했다. C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노련한 마술사가 나서서 A와 B에 고정된 관중들의 시선을 C로 돌려놨다.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A와 B 말고 이제 C를 좀 보자는 제언을 한 데 의미가 있다.

테이퍼링이 시작된 12월 회의는 벤 버냉키 의장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 빛난 회의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연준 통화정책 프레임을 테이퍼링에서 초저금리로 옮겨놓았다. 테이퍼링만 쳐다보던 시장참가자들에게 초저금리 유지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지 않은 것도 사실상 제로금리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초저금리를 유지하는 기준도 실업률에서 인플레이션으로 살짝 틀었다. 연준은 그동안 실업률이 6.5% 밑으로 가면 초저금리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으나 앞으로는 인플레이션 목표(2.0%)에 도달하기 전까지 제로금리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연준의 두 가지 임무를 고용과 물가라고 할 때 이제까지는 고용에 집중했으나 앞으로는 물가에도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12월 성명에 새로 추가된 문장에 이러한 연준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이번에 새로 추가된 문장은 "위원회는 실업률이 6.5% 아래로 떨어진 이후에도 현재 수준의 연방기금(FF) 금리가 유지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특히 인플레이션이 FOMC의 장기 목표치인 2%를 밑도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고 본다"는 것이다.

초저금리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구체적인 사항을 명기함으로써 테이퍼링에 쏠린 시장의 관심을 분산시켰다. 버냉키식 성동격서의 백미(白眉)다. 양적완화(QE)를 끝내더라도 제로금리를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하겠다는 연준의 스탠스에 시장은 환호했다.

만약 연준이 실업률에 계속 집중한다면 금리를 올리든지, 실업률 목표를 내리든지 택일해야 한다. 그러나 버냉키의 연준으로선 두 가지 모두 부담스러운 이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에 아직 여유가 있다면 그걸 빌미로 초저금리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개발한 것으로 분석된다.

현재 7.0%인 실업률이 6.5% 아래로 가더라도 제로금리를 유지한다고 했으므로 '실업률 목표를 6.5%에서 6.0%로 내린다느니, 5.5%로 내린다느니' 하는 월가의 논란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11월 현재 1.2%인 소비자물가를 보면 연준의 인플레이션 목표 2%는 아직도 여유가 있다. 실업률이 계속 떨어지더라도 인플레이션이 2.0%를 넘지 않는다면 금리를 올릴 명분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앞으로 연준의 관심사는 고용보다 물가에 있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동안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버냉키 의장은 연준을 떠나기 직전에 비로소 시장을 다스리는 해법을 깨달은 것 같다. 막판에 터진 그의 한 수에 연준은 QE 체제를 졸업하고, 비정상적인 통화정책에서 벗어나 금리를 중심으로 한 정상적 체제로 복귀할 수 있게 됐다. (국제경제부장)

jang73@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