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노현우 기자 = "다른 사람의 길을 가기보다 내 열정을 따라갔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은행 국장이 된 소재향(52) 양허성자금 국제협력부(CFP) 국장은 24일 직업인으로서의 '열정'을 유난히 강조했다.

소 신임 국장이 일하게 될 양허성자금 국제협력부는 개발도상국에 차관을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하며 그는 부총재와 국장, 과장 순으로 구성된 직위체계상 부총재와 과장 이하 직원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출생인 소 국장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중.고교를 졸업했다.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학사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마친 그는 글로벌컨설팅사인 모니터를 거쳐 1992년 세계은행의 공채제도인 '영프로페셔널 프로그램'을 통해 입행, 사무총장 보좌관, 아시아지역 선임 인프라 전문가 등을 역임했다.

연합인포맥스는 한국 최초의 세계은행 국장인 소 국장과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를 하고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한국 여성으로 국제기구에서 가장 높은 관리직에 오르기까지 겪은 일화들을 들어봤다.

국제기구에서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어떤 것인지도 알아봤다.





<소 국장과 그의 아버지(소문섭씨,우)와 어머니(백기선씨,좌)가 서대문구 문화촌 집앞에 서 있다. 이때는 세 명의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다. 현재 소 국장의 부모님과 동생들은 미국 뉴욕에 살고 있고 소 국장은 워싱턴에 살고 있다.>

다음은 소 국장과의 일문일답.

--유창한 영어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영어는 언제부터 배웠나.

▲1970년 유엔계발계획(UNDP)에서 근무하시는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발령받으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가게 됐다. 한국에서 나올 당시인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다.

※ 그의 아버지는 1991년에 UNDP 부대표로 정년퇴임 한 소문섭씨다.

--영어를 못해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어려움이 매우 많았다. 국제학교에 초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해야 했는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 초등학교 2학년으로 한 학년 낮춰 들어갔다.

--그러면 1년 늦게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인지.

▲3학년인데 2학년으로 들어간 것이니 1년 늦은 것이 맞다. 그런데 4학년에서 바로 6학년으로 올라가 1년 늦은 것을 만회했다.

--공부를 잘하게 된 계기가 있는 것인지.

▲어렸을 때부터 한국 사람들은 공부 잘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다 보니 그게 몸에 뱄던 것 같다.

--미국에도 아버지가 근무지를 옮겨서 가게 된 것인지.

▲UNDP는 개도국을 돕는 국제기구라 아버지는 4~5년마다 다른 개발도상국으로 옮기셨다. 부모님께서 내가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미국에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딩스쿨(중.고등 기숙학교)에 보낸 것 같다.

--부모님의 교육철학은 어떤가.

둘째 여동생이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부모님은 동생을 미국의 보딩스쿨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동생은 미국 대신 인도의 학교로 가겠다고 주장했고 결국 그 학교로 진학했다. 동생은 여름방학 때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며 테레사 수녀가 세운 고아원에서 몇 달간 일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하고 싶은 것을 해봐야 그 과정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하시며 동생의 결정을 존중해주셨다.





<문화촌 집 뒷산에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오른쪽부터 소 국장, 소재용씨, 백기선씨, 소신정씨, 소현정씨. 아버지는 사진을 찍느라 사진 속에 보이지 않는다.>

--국제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러웠다. UNDP는 개발도상국을 돕는 국제기구인데 나도 그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여성이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직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성공한 여성으로서 여성들에게 조언을 하자면.

▲나는 외교관이 되려는 목표로 외교학과에 진학하려다가 직업선택의 범위가 넓은 전공인 경제학과를 택했다. 유리천장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 가서 외교부에서 일을 할 수 있을 지와 대사가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아버지와 함께 살펴봤다. 나는 당시 한국에 유리천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세계은행에서 여직원들이 경력 개발하는 것을 살펴보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요새는 결혼해도 남편과 부인이 두 사람의 경력개발에 대해 의논한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려면 몇 년씩 개도국으로 나가야 하는데 3년은 부인을 위한 곳에 가서 살고 다음 3년은 남편을 위한 곳에 가서 산다. 여자가 수입을 책임지는 가정도 있다. 이런 경우가 한국에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일에 몰두하느라 결혼을 안 한 것인지.

▲나는 아직 결혼을 안 했지만 일 때문에 결혼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에 결혼을 안 한 것이다. 여성이 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결혼을 미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이 무엇인지.

▲여러 전문가가 많아서 배울 기회가 많다. 가족들은 내가 쉬면서도 일 생각을 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굉장히 보람되고 재밌다. (내가 졸업한) 스탠퍼드대 MBA 동창회에 가면 아마 내 연봉이 제일 적은 축에 속하겠지만,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은행의 행사에서 토론 진행하는 소 국장(가운데)>

--세계은행에서 했던 프로젝트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소개해줄 수 있는지.

▲터키 안탈랴에서 했던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 안탈랴는 빠르게 성장하는 관광도시여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상하수도 처리 시설 등을 빨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민간회사와 정부가 계약 맺는 것을 검토하는 일을 담당했다. 또 정부의 자금 지출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담당했다. 어느 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변호사들과 일을 하다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강한 시궁창 냄새를 맡았다. 하수도 처리장이 없어서 냄새가 났던 것이다. 그때 '내가 하는 일이 이 도시 시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세계은행에서 새로 맡게 된 일은 무엇인지.

▲트러스트펀드(양허성자금)에 자금을 포함한 자원을 조달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김용 총재가 지난해 취임하면서 전 세계 극빈층의 비율을 2030년까지 3%로 줄인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 목표를 이루려면 자금 조달이 필수적이다. 나는 자금을 최대로 조달하기 위해 여러 정부와 재단 관계자들을 만날 계획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지.

▲우선 새 업무를 맡았으니 그 일을 통해 세계은행에 기여하고 싶다. 또 한국인 후배들이 나보다 더 나은 자리에 올라가도록 돕는 멘토(조언자) 역할도 하고 싶다.

--멘토를 말씀하셨는데, 본인도 멘토가 있었는지. 멘토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인지.

▲멘토와 같이 일하면서 파트너십(협력)을 배웠다. 그는 어떤 프로젝트에서 본인이 성과를 내도 절대 자기가 해냈다는 말을 안 했다. 대신, 파트너십 덕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 멘토가 누구인지.

▲그는 제프리 골드스타인이고, 미국 재무부 차관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민간 기업으로 옮겼다.

--한국인 멘토는 없었는지.

▲나보다 7년 먼저 영프로페셔널 프로그램으로 들어 온 한국 여선배가 두 명 있었다. 한 분은 김경희씨인데 그분은 MBA 출신이 세계은행에서 어떻게 하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는지를 알려줬다. 세계은행 대부분의 직원이 박사 학위자여서 아무래도 MBA가 중요한 일을 맡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한 분은 김훈애씨로 그분은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전반적인 조언을 해주셨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 신입 때 프로젝트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현재 본인도 한국 후배들을 돕고 있는지.

▲세계은행에 있는 한국 직원들끼리 한 달에 한 번 모인다. 점심을 함께한 후, 이력서를 어떤 식으로 써야 하고, 면접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진행한다. 세계은행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인터뷰에 임해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이 과정에서 돋보이지 않으면 나은 직위로 올라갈 수 없다. 지난번에는 네트워킹(관계형성·유지)에 대한 세미나를 연적도 있다. 세미나는 선배 몇 명이서 돌아가면서 맡아 진행한다.

--본인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성공 요인이라 하기는 어렵고 내가 가진 철학을 말해주고 싶다. 성공하려면 본인의 열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공부하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은 최소 요건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 페이스북을 창업한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의 열정을 따라갔고, 세계은행의 김용 총재도 본인의 열정을 따라간 경우라 할 수 있다. 김용 총재는 하버드대의 교수직을 내려놓고 비정부기구(NGO)를 세워 페루로 갔다. 성공의 정점으로 볼 수 있는 하버드대 교수직을 내려놓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국제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고자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지.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개발도상국에서의 생활이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 개도국에서 지낸 경험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 중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국제기구에서 경험을 쌓는 것도 좋고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기획재정부에서 매년 개최하는 국제기구 채용박람회를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박람회에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을 비롯한 8개 국제기구의 관계자가 참여해 현장에서 면접을 진행하기도 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소 국장(왼쪽에서 7번째, 빨간색 원피스)과 워싱턴에서 근무하는 그의 팀원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다.>

hwro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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