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인사권 내려놓겠단 임종룡…'정면돌파 vs 사후약방문'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원 기자 = 손태승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친인척 부당대출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져 거취를 둘러싼 관심이 커진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이 '인사권한 축소' 카드를 꺼내들었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에 대한 회장의 인사권한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공언인데, 최근 상황을 정리하는 수습책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손태승 전 회장 건과 잇따라 터진 금융사고 등 내부통제 부실 등이 고질적인 파벌주의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고, 그 밑바탕에는 회장의 '제왕적 인사권'에서 비롯됐다는 문제의식으로 보인다.
다만, 취임 2년 가까이 된 시점에서야 인사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 우리금융만 보유한 '사전합의제'…조만간 폐지 수순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금융은 최근 내부적으로 계열사 임원 인사 규정인 '사전합의제'를 폐지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조만간 관련 작업을 완료한 뒤 올해 말 임원인사부터 자회사 대표가 주도하는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게 우리금융 입장이다.
해당 사항은 내부 결정 사항으로 별도의 이사회 승인 절차 등은 필요하지 않다.
사전합의제는 우리금융만이 보유한 기형적 인사 제도 중 하나다.
지주사 전환 이후 한일-상업으로 나뉘어 지주와 은행을 경영하면서, 지주 회장이 주력 계열사인 우리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과정에도 도출된 제도다.
우리금융 '자회사 등의 경영관리 규정'은 현재 "자회사 경영진(은행 본부장급 포함) 인사는 사전 합의 사항이다"라고 못 박고 있다.
지주 회장 역할을 고려하면 인사 과정에서 '협의' 과정은 충분히 오갈 수 있지만, '합의'를 명시하고 있는 것은 계열사의 자율적 경영 여건을 보장하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괴리가 크다.
특히, KB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등은 '합의'에 대한 규정 자체가 없다. 자회사 대표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지주 회장과 일정 부분의 협의를 거치는 정도다.
하지만 우리금융의 경우 지주 회장의 '합의'가 인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제왕적 지주 회장 체제' 속에서 그간 계열사 대표의 권한은 미미했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결국 사전합의제는 은행 본부장 등에 대한 지주 회장의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나온 악습 중 하나다"며 "은행의 영향력이 막강한데 임원 인사 권한을 출신이 다른 2인자(우리은행장)에게 줄 수 없다는 욕심에서 탄생한 제도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국 이 또한 한일-상업간 파벌싸움의 잔재다"면서도 "외부 출신인 임 회장 또한 취임 초기엔 조직 장악 측면에서 해당 제도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 금융지주 회장 했던 임종룡…"사전합의제 문제 진짜 몰랐나"
이렇다 보니 임 회장의 '진정성'에 대한 평가도 갈린다.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을 거쳤던 금융 전문가 임 회장이 '사전합의제'라는 기형적인 제도를 임기 절반이 지나도록 방치했던 것을 두고 실제로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인지, 혹은 알면서도 이를 악용했던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어서다.
결국 조직 장악력을 위해 해당 제도를 이용하다가, 손 전 회장의 부당대출 의혹과 맞물려 '사후약방문' 격으로 폐지 입장을 내놨다는 평가도 늘고 있다.
진정한 문제 해결 보단 최근 불거진 책임론을 회피하려는 차원에서 '사전합의제 폐지'를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인 셈이다.
우리금융의 '사전합의제'는 손태승 전 회장의 친인척 부당대출 등 최근 벌어졌던 내부통제 마비 사태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손 전 회장 라인의 임원들이 이번 부당대출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지속되면서, 지주 회장이 은행 임원 선임에도 영향을 주는 구조엔 문제가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우리금융 내부에서도 사전합의제에 문제 의식은 있었다.
금융지주 가운데 유일하게 합의 규정을 두고 있는 데다, 암묵적으로 한일-상업이 회장-행장을 번갈아 가는 구조였던 만큼 인사권에 큰 영향을 주는 제도인 '사전합의제'를 놓고 매번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다만, 해당 제도로 인한 '득과 실'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감에 폐지 주장에는 좀처럼 탄력이 붙지 않았다.
우리금융 내부 관계자는 "사전합의제는 사실 은행을 제외한 계열사 임원에는 큰 영향을 줬던 이슈는 아니다"며 "사실상 우리은행 본부장급 이상의 인사에 대해서만 적용됐다. 핵심 계열사로 지주 회장 이상의 인사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리은행장이 다른 은행 출신일 경우, 지주 회장의 입지를 담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고 했다.
임 회장 또한 사전합의제의 문제점은 일찌감치 인지했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 인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CEO로 내정된 직후 '물갈이' 인사를 진행했던 만큼, 임 회장 또한 이원덕 전 우리은행장과의 은행 인사 논의 과정에서 인사 절차 상의 특이사항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NH농협금융 또한 계열사 대표가 한 임원 인사를 지주 회장의 '합의'하는 구조도 아니다. 사전합의제가 은행권 공통의 관례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얘기다.
어쨌든 임 회장이 사전합의제 폐지를 공언하면서 향후 인사에 대한 영향력은 경쟁 금융지주 회장들 수준으로 조정될 전망이다.
지주사 임원과 계열사·관계사 대표 등 20여곳에 한정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은행권 관계자는 "계열사 임원에 대한 인사권을 내려놓겠다는 임 회장의 얘긴 사실 '비정상을 정상화하겠다'는 수준에 불과한데 이게 어떻게 그간의 사고에 대한 대책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정면돌파'를 택했다면 보다 진정성 있고 정교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j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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