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세연의 프리즘] 모험자본과 론스타·MBK

2025-09-11     곽세연 기자

(서울=연합인포맥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증권사, 자산운용사 CEO와의 취임 상견례에서 쓴소리부터 했다. 모험자본을 사업 확장 수단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이 원장은 "모험자본 공급은 정책 지원이 전제돼야만 고려할 수 있는 '조건부 선택'이 아니라 금융투자회사의 '존재 이유'이자 '본연의 역할'임을 분명히 인식해 달라"고 강조했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1호 공약'으로 내세웠던 BDC(기업성장집합투자기구) 도입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일반 투자자도 상장펀드 형태로 참여해 벤처, 중소기업에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제도다. 내년부터 개인이 ETF처럼 BDC에 투자할 수 있게 되면 민간 모험자본 시장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의 화두는 생산적 금융, 모험자본이다. 사실 생산적 금융을 하기 위해서는 모험자본이 필수적이다. 모험자본은 창업, 벤처기업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고 성장을 지원하는 민간 전문투자자의 자본을 의미한다. 창업 초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 등의 기업 생애주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크기 위해, 성장 정체기 경영 효율화나 신사업 확대를 위해, 구조조정을 주도하기 위해 투입되는 자본이다. 주로 벤처캐피탈, 사모펀드가 한다.

우리나라가 모험자본의 중요성을 인식한 건 의외로 이른 1980년대부터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건 모든 것을 바꿔 놨던 IMF 이후다. 정부 주도의 모험자본 육성 계획은 거의 매 정권마다 반복됐다. 김대중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벤처육성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1차 벤처붐이 일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기술특례 상장 제도를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성장사다리펀드 조성 계획에 나섰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참여형 뉴딜펀드 20조원 공급 계획을 밝혔다.

이재명 정부는 금융권이 첨단산업, 벤처, 대체투자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생산적 금융 확대를 위한 국민성장펀드를 당초 100조원에서 150조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모험자본 활성화를 위해 퇴직연금의 VC 투자를 허용하는 방안도 본격적으로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도 모험자본 중요성이 강조되는 건 그만큼 잘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실제 발행어음 인가를 받겠다고 신청한 증권사들이 줄을 섰지만, 그런 증권사를 보는 금융당국의 눈길은 싸늘하다. 인가 없이도 그동안 모험자본 공급에 열심이었다는 척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도 없고, 최근에라도 부랴부랴 늘리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게 당국의 불만이다. 증권사들도 대출업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모험자본을 둘러싼 과거의 나쁜 기억도 있다. IMF 이후 많은 기업이 외국계 모험자본에 헐값에 매각됐고, 이들 투자자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뒀다.

진로가 유동성 위기로 매각되면서 골드만삭스가 1조원이 넘는 이익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 게 대표적이다. 최근 소주전쟁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골드만삭스는 진로 부실채권을 액면가에 한참 못 미치는 가격으로 사들여 5배 넘는 이익을 봤다.

또 먹튀, 탈세, 부실투자, 단기 이익 추구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도 있다. 라임과 옵티머스 사태는 신뢰의 자본이라는 기본원칙을 상실했다.

최근에는 MBK·홈플러스 사태로 모험자본 업계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MBK는 부동산 매각, 점포 축소, 디지털 쇼핑 확대 등 홈플러스에 다양한 경영 시도를 했지만, 비싸게 산 탓에 늘어난 차입금 이자를 갚지 못하고 지난 3월 기업회생 절차를 개시했다. 불과 회생 며칠 전 시장에서 단기어음을 발행하는 비난받을 일도 했다.

모험자본은 곧 고위험을 뜻하기 때문에 높은 수익률을 낸 투자자를 욕할 수 없다. 진로의 경우 IMF 유동성 위기를 넘기지 못했다면 국민기업으로 지금 우리 곁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창업자가 사업을 계속 펼칠 수 있도록 필요할 때마다 유동성 위기를 구해낸 좋은 사례도 많다. 잠깐의 유동성 위기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이 모험자본이다.

2010년 설립 이후 단 한 번의 이익을 내지 못했던 쿠팡의 경우, 2019~2020년 부도 직전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매년 1조 이상의 적자를 내는 쿠팡에 손정의 회장의 비전펀드는 2015년, 2018년 투자해 지금의 쿠팡 과실을 누린다. 셀트리온에 투자한 테마섹도, 총 7차례 투자를 받은 배달의 민족도 기업과 모험자본이 '윈윈'한 사례로 꼽힌다.

모험자본은 혁신과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위험'이다. 좋은 사례보다 론스타와 MBK처럼 사회적 비용을 남기는 나쁜 사례가 더 강하게 기억되는데, 이런 두려움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 나쁜 결과를 피하려는 마음이 때로는 더 큰 기회를 놓치게 만들 수 있어서다.

이재명 정부 모험자본의 윤곽이 드러났다. 정부는 150조원의 국민성장펀드 자금조성에서부터 지원대상, 지원방식을 구체화했다. 특히 은행 출자시 위험가중치를 완화하고, 증권 종투사 모험자본과 연기금투자풀 투자 대상에 추가하는 등 인센티브를 마련했다. 한국거래소, 예탁원, 증권금융 등 여유자금에다 일반 국민 공모자금도 더해진다. 재정은 자율적인 민간, 금융기관, 국민 자금보다 위험을 먼저 부담해 민간자금 참여의 '마중물'이 된다. 정부의 바람대로 대규모로 조성된 이 모험자본이 진정한 생산적 금융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해본다. (증권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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