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의 글로브] APEC의 승자
(서울=연합인포맥스) 지난 주말 마무리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과 달리 연일 대형 뉴스가 쏟아져나왔다.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몇 달간 교착 상태였던 한미(韓美) 관세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것이다. 최대 쟁점이었던 3천500억달러 대미 투자 금융 패키지의 경우 2천억달러를 현금 투자로 하되 연간 투자 한도를 200억달러로 제한해 환시 충격을 최대한 줄였다. 자동차 및 부품 관세는 25%에서 15%로 낮아졌고, 반도체는 주된 경쟁국인 대만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받기로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핵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을 공개 요청하고, 이튿날 트럼프 대통령이 건조를 승인한 것도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뉴스였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한미 관세 협상 세부 내용보다 핵추진 잠수함 이슈에 더 놀랍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기업 사이드에서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깐부치킨 회동'이 큰 화제가 됐다. 이 회장과 정 회장은 직후 열린 엔비디아의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 행사에도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행사 참가자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젠슨 황 CEO는 다음날인 31일 이재명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 대통령 임기 내 한국에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 장을 공급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GPU를 대량 확보하게 되면서 미국과 중국에 뒤처졌던 한국이 AI 분야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나온다.
그 밖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신라 천마총 금관 모형, 이재명 대통령의 샤오미폰 통신보안 발언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백도어 발언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연달아 펼쳐지자 '대한민국을 두고 전 세계가 몰래카메라를 찍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소리도 나왔다. 외신들도 이번 APEC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중재 외교가 빛을 발했다며 성과를 대체로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한국 외에도 이번 APEC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 있다. 바로 중국이다. 주최국으로서 들어간 비용과 노력을 고려하면 어쩌면 가성비(?) 측면에서 중국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30일 6년 4개월 만에 이뤄진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의 정상회담은 양측의 무역 긴장을 낮췄으나 미해결 과제가 많아 불안정한 휴전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번 회담을 통해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 조치 유예, 미국산 대두 구매에 나서기로 했고 미국은 대중 관세 10%포인트 인하를 결정했다. 다만 양측 관계가 관세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데 그쳤을 뿐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이 G2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부각시켰다는 시각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미국의 경쟁자(peer rival)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단기전을 준비하고 있지만 중국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봤다.
BNP파리바는 양측의 무역전쟁과 관련해 "워싱턴은 이제 미국에 실질적인 경제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경쟁자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다"며 "이는 미국에 있어 비교적 새로운 포지션이며, 적어도 우리에게는 중국이 세계 경제 초강대국 지위(global economic superpower status)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CNN은 2시간이 채 안되는 정상회담에서 중국 지도자들이 강경 전략을 통해 미국에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한 보복 조치를 거뒀을 뿐인데 관세 부분에서는 값진 양보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매체는 이미 정상회담 이전부터 "회담 결과와는 상관없이 중국이 승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다자외교를 싫어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APEC 본회의에 불참한 채 조기 귀국한 것을 두고도 미국 현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AP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정상회담 이후 곧바로 귀국길에 올라 핼러윈 행사를 즐기는 사이 시 주석은 APEC 일정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 머물렀다며, 이는 트럼프 부재 속에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려는 계산이라고 봤다.
CNN은 "정부가 수렁에 빠진(셧다운 중인) 미국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돌아가는 사이, 시 주석은 중국을 '세계화의 등불'이라고 선전했다"며 "양국간 힘의 균형이 바뀌었음이 분명해졌다"고 전했다.
지난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회동을 깜짝 제한했을 당시 북한은 약 5시간 만에 긍정적인 반응을 내놨지만 이번에 북한은 거듭된 트럼프의 러브콜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미중 관계만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약자는 언제나 힘의 이동에 예민하다.
APEC 이후 우리에게는 많은 과제가 놓여있다. 단기적으로는 각종 정상회담의 결과가 그대로 이행될지 계속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번에 눈으로 확인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중장기적 과제를 던져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국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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