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원의 뷰포인트]고용없는 성장 '시즌2'

2025-11-05     이장원 기자

(서울=연합인포맥스) 2천년대 중반 미국에서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기업 이익은 늘고 경제는 성장 가도를 달렸지만, 그에 뒤따르는 고용은 진척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당시 고용없는 성장을 이끈 동력은 세계화와 IT(정보기술) 혁명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미국의 기업들은 중국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조업의 해외 이전(오프쇼어링)이 유행을 탔고, 이는 미국 내 고용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됐다. IT기술의 혁명은 업무 효율화를 이끌어 단순 반복적인 사무직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게 됐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공지능(AI) 혁명이 세상의 모든 일자리를 씹어먹고 있어서다. AI가 활성화되던 초창기엔 블루칼라 직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란 전망이 유력했지만,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나온 이후엔 화이트칼라의 일자리가 대거 사라지기 시작했다.

IBM(NYS:IBM)과 아마존닷컴(NAS:AMZN), 메타(NAS:META), 세일즈포스(NYS:CRM), 체그(NYS:CHGG) 등 미국 기업들은 최근 수천 명에서 수만 명 규모의 인력 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감원의 배경에는 'AI를 통한 생산성과 효율성 극대화'라는 공통된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CRM 기업인 세일즈포스의 마크 베니오프 최고경영자(CEO)는 AI로 인해 고객 지원 직무 규모를 대폭 줄였으며 AI가 이미 회사 업무량의 최대 50%를 처리한다고 밝혔다. 교육 기술 기업 체그는 AI의 등장으로 인해 자사 매출이 급락하자 인력의 45%를 해고했다. 이는 AI가 특정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다. 아마존은 표면적으로 대량 해고의 이유가 비대해진 조직문화를 정비하기 위함이지 AI 영향 때문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나 시장에선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외신들은 챗GPT 등장 이후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들은 작업량과 보수 모두에서 감소세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 직업군은 AI로 인한 일자리 대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영역이다.

AI는 해고를 늘릴 뿐만 아니라 신규 채용도 축소시키고 있다. 이는 청년층의 일자리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미국 코딩 직군에서 특히 청년층의 채용 감소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이는 경제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탠퍼드 디지털 경제 연구소에 따르면, 젊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고용률이 2022년 말 대비 거의 20% 감소했다. 하버드 및 킹스칼리지 런던의 연구에서도 AI를 도입한 기업들, 특히 기술 섹터에서 주니어급 채용이 감소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외식 체인인 치폴레는 지난달 29일 실적발표에서 25세~35세 사이의 젊은 층들이 재정적 곤란함을 겪고 있어 레스토랑 매출이 줄었다고 밝혔다.

젊은 층의 열악한 재정 상황은 학자금 대출 상환 실적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뉴욕 연방준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9월 학자금 미납 유예 기간이 종료된 후 학자금 대출 연체율이 1%에서 7.74%로 급등했다.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고용없는 성장' 때문에 미국 노동시장이 새로운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I 확산과 고령화, 낮은 이민 수준이 결합해 고용이 정체된 채 생산성만 향상하는 현상이 미국 경제의 '뉴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도 지난 9월 '저고용-저해고(low-hire, low-fire)'라며 "대졸 청년과 청년층, 소수 인종이 일자리를 얻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고용 없는 성장의 현실화를 우려했다.

아직 잠잠하지만 우리나라도 산업현장에서 AI를 본격 활용하면서 고용시장에 충격파가 전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곧 현실화할 전망이다. 경제는 회복돼도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 현상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다. 신규 취업문이 닫힌 청년들의 방황은 계속될 것이고 중장년층은 불안한 노동시장에서 AI와 힘겨운 전쟁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경제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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