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권의 쿰파니스] 주식 이민과 고환율
(서울=연합인포맥스) 환율은 우리에겐 여전히 트라우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진 지 30년 가까이 되지만, 썰물처럼 달러가 빠져나가는 상황을 목도하면 늘 불안하다. 국가부도에 따른 심리적, 물질적 충격 여파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탓이다. 전직 경제부총리의 '환율 1,400원 뉴노멀'이라는 말은 이제 이상하지도 않을 만큼 현실이 됐다. 달러-원 환율은 어느새 1,500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 나라의 환율 수준은 그 나라 경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수출주도 소규모 개방경제의 대한민국에서 고환율은 수출을 늘리는 효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경제 규모가 '소규모'를 넘어섰고 '개방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현재 한국경제에 고환율은 되레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올해 초 국내 5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3%의 기업은 올해 사업계획을 짜면서 달러-원 환율 기준을 1,300원으로 잡고서 투자와 자금조달, 비용 등을 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어느새 환율은 이보다 200원 가까이 높아졌다. 수출 기업의 경우 원화 환산 수출대금이 늘어나는 효과를 봤겠지만, 비용 부담도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높아졌기 때문에 별다른 긍정적 효과는 없다. 원자재와 중간재 가격 상승에 따른 비용 부담은 되레 더 커졌다. 원가 부담이 커진다는 의미다. 결국 채산성이 나빠질 가능성도 커진다. 제조업 중심인 우리나라 산업구조에서 원자재와 주요 부품의 수입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데 급격한 원가 변동과 부담 증가는 실적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연구개발과 해외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대기업들은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하거나 차입해 직접 달러를 조달하는 경우도 많은데, 급격한 환율 상승은 이자 부담을 늘릴 뿐 아니라 장부상 환손실로도 연결될 수 있다. 투자 시점을 조정할 수밖에 없고, 결국 경영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 성장을 위한 기초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환율 변동을 회피하기 위한 헤지가 마냥 쉽지도 않다. 추가적인 비용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변동성이 더 커진다면 헤지를 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쉽지 않다. 불확실성의 굴레에 빠져드는 셈이다.
기업만 힘든 것은 아니다. 한국은행이 21일 발표한 지난달 생산자물가지수는 120.82로 전월보다 0.2% 뛰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1.5% 올랐는데 작년 2월(1.5%)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세였다. 생산자물가는 생산자가 시장에 공급하는 상품과 서비스 등의 가격 변동인데, 통상 1분기 내 소비자 물가에 반영된다. 공급물가지수도 전월보다 0.9% 올랐다. 작년 4월의 1.0% 이후 최대 상승 폭이다. 최근 반도체 가격 상승에 더해 환율 상승도 한몫했다. 이러한 물가 지표들이 우상향을 보이는 데는 환율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당분간 환율 오름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종국적으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 리스크가 확대되면 금리에도 영향을 주게 되고 개인들의 이자 비용 부담도 커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현재의 고환율이 경제적 부담에 분명 부정적 영향을 주고는 있지만, 외환위기 때와 같은 트라우마를 초래하는 변수가 될 수 있을지에는 "아니다"라는 의견이 훨씬 우세하다. 달러가 부족해서 은행들이 무차별적으로 달러 단기차입에 목매던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과는 분명히 다르다. 당시만 해도 정부의 고위 관료는 '직(職)을 걸고 달러를 가져오겠다'며 미국으로 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 환율 수준이 느닷없이 2,000원을 넘어서는 '비상' 상황으로 가지 않는 한 발생하지도 않을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경제의 위기를 감지하고 외국인 또는 해외 투기 세력들이 원화를 팔아 '탈(脫) 코리아'에 나서는 상황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채권시장이든 주식시장이든 외국인들은 꾸준히 들고 나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경제 펀더멘털을 반영하는 국채를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수출이든 자산시장이든 달러는 계속해서 공급되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벌어들이는 달러가 족족 밖으로 새는 데는 해외투자 열기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개인으로 대표되는 '서학개미'는 물론, 국민연금을 필두로 한 기관들은 해외로 향하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증시부양 드라이브에 힘입어 코스피가 4,000선을 넘어서는 '불장'이 이어지고 있지만, 개미들은 미국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주식 이민에 버금갈 정도다.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 15일까지 9개 증권사에서 개인들이 환전한 금액만 158조원에 달한다. 작년 전체 규모(136조원)를 훨씬 넘어섰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분기 말 기준 대차대조표에 따르면 대외투자를 의미하는 대외금융자산은 2조7천976억달러다. 사상 최대 규모다. 국내 거주자가 3분기에만 투자한 해외증권은 890억달러에 이른다. 이 역시 사상 최대다.
한국 증시가 불장이라고는 하지만 미국 증시는 더 큰 불장이다. 더군다나 기대수익률은 더 높다. 주가 상승에 더해 환율도 오르니 양방으로 먹을 기회가 생긴다. 미국 주식 투자가 늘면 늘수록 환율은 더 오를 유인이 커지는데, 미국 주식이 조정을 받더라도 환율 상승에 따른 환차익만으로도 벌거나 손실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주가가 오르면 이익을 보고 떨어지면 손실을 보는 국내 주식의 단방향 거래 구조와는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결국 지속해 고환율로 가게 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미국 주식을 사겠다는 개인 투자자에게 투자를 자제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돈 벌겠다는데 국가가 나서 뭐라 할 수도 없다. 결국은 시스템을 보완하는 수밖에 없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증시 활황 속에 장기 투자자들의 혜택을 더 늘리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기재부는 세제 혜택을 늘리는 대책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 중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게 일본이 작년에 도입한 신(新)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를 벤치마킹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장주식과 펀드 등에서 발생한 배당과 양도차익을 연간 100만엔 한도 내에서 5년간 비과세하던 구조를 작년에 새롭게 개편하면서 투자 한도를 2~3배 늘리고, 비과세 기간도 사실상 평생으로 확대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는 과세대상소득 중 200만원(서민형 400만원)까지 비과세하고, 초과분은 9.9% 분리과세를 적용하는데 이와 비교하면 파격적이다. 만약 비슷한 상품이 도입된다면 개인투자자들을 충분히 유인할 수 있다.
일본 금융청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신NISA 계좌수는 2천560만계좌로 1년 전의 2천125만계좌보다 약 17% 증가했다. 투자 한도 확대와 대폭적인 비과세 혜택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국민 재테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 계좌를 통해 일본 증시에 유입된 자금도 약 3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계좌를 활용해 해외 주식 등에 투자한 자금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NISA를 활용한 펀드 가운데 80%가 해외 주식만으로 구성됐다. 그렇다 보니 해외 증권투자액은 2015년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엔화의 구조적 약세 흐름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고 있어 뒤늦게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 정부도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해외투자에 나서는 개인투자자들에게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겠지만, 해외투자 수요를 국내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역차별적인 세제 혜택도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기본 전제는 국내 증시에 대한 매력도를 더 높이고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단순히 투자자들에게 세제 혜택을 주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현재의 구조적인 외환시장의 수급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따로국밥 정책만 남발할 게 아니라 좋은 재료와 레시피로 구성된 맛있는 종합정책도 필요하다.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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