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의 '빛나는 지각 임명장'

2025-11-26     유수진 기자

(서울=연합인포맥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5개월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임명장 받을 시간도 없이' 바쁘고 또 바빴다.

이달 초 최종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에서 일익을 담당한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이야기다. 여 본부장의 임명장은 주인과 만나기까지 5개월이 넘게 걸렸다.

김민석 총리,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임명장 수여
(서울=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김민석 국무총리가 25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차관급 임명장 수여식에서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고 있다. 2025.11.25 uwg806@yna.co.kr

김민석 국무총리는 25일 오후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차관급 공직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날 임명장을 받은 12명 중엔 여한구 본부장도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10일 임명했으니, 누가 봐도 '지각 임명장'이다. 날짜로 계산하면 168일 만이다.

실제로 여 본부장은 이날 같이 임명장을 받은 다른 인사들보다 취임 시점이 월등히 앞선다.

예컨대 이정렬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부위원장과 이병권 중소벤처기업부 2차관은 지난 14일, 김용선 지식재산처장은 지난 3일 임명돼 업무를 시작했다. 나머지 인사들은 대부분 8~9월에 직을 맡았다.

가장 이른 편에 속하는 조원철 법제처장도 7월 13일 임명됐다. 임명장을 받기까지 4개월이 넘게 걸렸지만, 여 본부장보다는 한 달여 짧다.

여 본부장과 같은 날(6월 10일) 임명된 이들과 비교하면 얼마나 늦었는지 더욱 실감이 난다.

박윤주 외교부 1차관과 이형일 기획재정부 1차관, 임기근 기재부 2차관은 지난 7월 31일 김 총리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같은 산업부 소속인 문신학 차관도 7월 마지막 날 임명장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 본부장이 '지각 임명장'을 받은 건 한미 관세 협상으로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김 총리가 임명장을 건네며 "지난 5개월여간 임명장도 없이 미국과 협상까지 하셨다"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면담
(서울=연합뉴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미국무역대표부 회의실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와 한미 관세 협상 진전 방안 등에 대한 논의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5.7.26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여 본부장은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압박을 본격화하던 지난 6월 취임했다. 한미 양국이 합의한 '7월 패키지(줄라이 패키지)' 협의 시한(7월8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작년 말 계엄 사태 등으로 리더십 부재를 겪으며 경쟁국 대비 협상이 더딘 상태였다. 사실상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심지어 바로 협상에 뛰어들 분위기도 안 됐다. 한국 국내 상황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미국 협상단에 새 정부가 민주적 정당성과 위임사항을 확보했고, 정치적 불확실성이 사라졌다고 알리는 게 첫 과제였다.

이때부터 강행군이 이어졌다.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 7월 21일 취임한 김정관 산업부 장관보다 한 달 정도 먼저 협상에 투입됐다.

취임 열흘 만인 6월 22일 첫 방미를 시작으로 대여섯 차례 미국을 찾았고,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협상에 임하겠다"는 각오로 귀국 비행기표를 끊지 않고 미국으로 향한 적도 있다.

여 본부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통상전문가이자 '경력직' 통상교섭본부장이다.

2017년 트럼프 1기 때 산업부 통상정책국장과 주미대사관 상무관으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이끌었고, 문재인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하게 협상을 이끌어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에게도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은 만만치 않았다. 트럼프 2기는 과거와 180도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시시각각 상황이 변했고, 거의 의견 합치를 이뤘던 내용이 뒤집어는 일도 허다했다.

바쁜 건 둘째 치고 다리를 쭉 펴고 잠들기 어려운 나날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책임감과 부담감이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여 본부장은 평소 사석에서 가볍게 즐기는 술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선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10시간이 넘는 비행 내내 협상 전략을 짜는 데 집중했다. 머리엔 늘 '국익 우선'이란 네 글자가 있었다. 그렇게 한미 관세 협상 타결 과정에서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그렇게 직면 과제를 마무리하고 마침내 임명장을 받아든 여 본부장. 소회는 어떨까.

여 본부장은 "지난 5개월 동안 비상 상태로 정신없이 달려온 듯하다"며 "미국은 물론, 미국 이외에도 산적해 있는 통상 현안을 본격적으로 챙기려고 한다"고 밝혔다. (산업부 유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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