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진정호 기자 = 올해 연기금 업계는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압박이 거셌던 한 해로 기억될 듯하다. 미국발 긴축 기조로 전 세계 주식 및 채권시장이 타격을 입으면서 연기금의 운용 수익률도 급락을 피할 수 없었다.

국내에선 국민연금이 달러-원 환율 급등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금융당국이 환 전략에 공개 개입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국은 또 채권시장이 휘청거리자 연기금에 채권 매입도 독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관치 금융' 논란이 불거진 것도 이슈였다. 때마침 국민연금의 지휘 라인에는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들(모피아)이 자리를 잡아 얘깃거리를 낳기도 했다.

주요 공제회도 곤란을 겪었던 2022년이었다. 시중은행 금리와 공제회 급여율 간 괴리가 커지면서 회원들의 자금 이탈이 가속했고 달러-원 환율까지 뛰면서 '캐피털콜'을 막기 위해 외부 자금을 수혈해야 했다. 이를 막기 위해 빠른 속도로 급여율을 올렸는데 그만큼 목표 수익률이 더 높아진 점은 또 다른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지부진했던 연금개혁 논의도 연말부터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내년에 재정추계 전망이 나오면 연금개혁이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익률 동반 추락의 쓴맛

올해 연기금들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가파르게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미국 증시가 추락하고 채권금리가 급등한 탓에 전 세계 주식, 채권시장도 타격을 입었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주요 연기금도 이 같은 충격파를 피해갈 길이 없었고 유동성 파티로 지난 몇 년간 누렸던 '단맛'은 빠르게 '쓴맛'으로 변해갔다.

국민연금은 지난 9월 말 기준 올해 운용 수익률이 -7.06%를 기록했다. 지난해 운용 수익률이 10.86%,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 평균 수익률이 10.59%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이 급격히 흡수된 영향이 컸다. 이에 따라 기금 규모도 지난해 말의 948조원에서 올해 896조원까지 50조원 넘게 감소했다. 지난해 벌어들인 수익의 절반 가까이 날아간 셈이다.

다른 연기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사학연금은 10월 말 현재 수익률(평잔 기준)이 -5.7%, 기금 손실액은 1조2천400억원에 달했다. 공무원연금도 같은 기간 -5.6%의 수익률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나마 달러-원 환율이 급등하면서 주요 연기금의 해외 자산도 환차익이 커져 가격 하락분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다. 달러-원 환율은 연초 1,100원대 후반에서 지난 10월 1,400원대 중반까지 이례적으로 급등했다.

◇국민연금·한국은행, 14년 만의 달러화 스와프

국민연금이 14년 만에 한국은행과 외환 스와프를 재개하기로 한 점은 외환시장의 큰 이슈였다. 국민연금은 한국은행과 올해 말까지 1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한국은행과 달러화를 조달하는 외환 스와프 계약을 체결했다.

외환 스와프는 통화 교환의 형식을 이용해 단기적인 자금을 융통하는 계약이다. 계약에 따라 국민연금은 해외 투자 때 외화가 필요하면 달러화를 시중에서 구하는 대신 한국은행이 보유한 달러화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국민연금이 한국은행과 이처럼 스와프 계약을 맺은 것은 달러-원 환율이 급등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의 영향이 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에 필요한 달러화를 미리 매입해두려고 하면서 환율이 튀었다는 불만이 시장 일각에서 제기됐다.

국민연금은 이에 "기금이 달러-원 현물환 일평균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대에 불과하다"며 이례적으로 반박 자료를 냈다.

◇국민연금 환헤지 비율 10%까지 상향

국민연금의 또다른 외환 전략 변화는 환헤지 비율을 최대 10%까지 늘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민연금은 이달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해외투자정책 조정방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환헤지 비율을 시장 상황에 따라 최대 10%까지 한시적으로 상향하고 해외주식의 전략적자산배분 허용범위를 ±3.0%포인트로 늘리기로 했다.

이는 금융당국의 요청에 따른 조치다. 앞서 지난 11월 중순 기획재정부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적 연기금 등에 환헤지 비율을 10%까지 상향 조정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외환시장이 여전히 불안정한 만큼 연기금들이 달러화 매입을 일정 부분 자제해달라는 취지였다.

국민연금의 환헤지 비율 상향은 7년 만이다. 국민연금은 2015년부터 모든 해외자산에 대해 전략적 환헤지 비율을 0%로 설정하고 있는데 100% 환오픈이 자산가격 방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연금은 환헤지 비율을 상향하기로 하면서도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장 10%까지 비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 대응 시나리오를 두고 탄력적으로 운용하겠다는 것이다.

◇관치 논란 부른 당국의 '협조 요청'

금융당국이 주요 연기금에 정책 '협조'를 요청했지만, 실상은 압박한 것이라며 관치 금융이라는 논란도 불거졌다.

앞서 10월 채권시장이 휘청거릴 때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은 주요 연기금을 소집해 채권을 적극적으로 매입하고 과도한 추종 매매나 대규모 환매, 자금이탈 등은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채권시장이 혼란스러우니 연기금만이라도 예민하게 대응하지 말아 달라는 주문이었다. 특히 국민연금에는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매입해달라고 별도로 요청하기도 했다.

지난 11월에는 기재부가 주요 연기금 및 공제회를 대상으로 환헤지 비율을 10%까지 상향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각 연기금 및 공제회마다 상황이 다르고 그에 따른 대응 전략도 다른데 일률적으로 10%까지 높여달라고 당국이 사실상 지휘에 나선 것이다.

연기금 업권에선 경제 상황이 다급한 것은 이해한다면서도 정책 개입으로 손실을 보면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재부는 정책 지시를 내리고 자리를 옮기면 그만이지만 잘못된 환헤지에 따른 손실은 연기금이 고스란히 떠안고 결국 피해는 국민들이 볼 것이라는 우려다.

◇'모피아'로 지휘 계통 구성한 국민연금

관치 논란과는 별개로 국민연금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의 장관과 국민연금 이사장 자리에 기재부 출신 관료가 자리 잡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기획재정 부처 출신이 복지부 장관이 된 것은 지난 2007년 이후 15년 만이다. 앞서 1993년 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 명칭이 변경된 후 기획예산처 출신 변재진 장관이 2007년 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된 바 있다. 복지부 장관은 그간 보건복지 계열 관료나 교수 등이 장관을 맡곤 했다.

기획재정 출신 관료가 국민연금 이사장을 맡은 것은 좀 더 흔하다. 김태현 이사장에 앞서 전임 김용진 전 국민연금 이사장도 기획재정부 제2차관을 역임한 뒤 국민연금 수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수장과 주무부처 장관이 모두 기재부 출신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업계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일관된 지휘 계통을 바탕으로 연금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은 조 장관을 임명하면서 "연금개혁을 이끌 적임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첫발은 뗀 연금개혁 논의

연금개혁 문제도 올해 사회적으로 활발히 거론됐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연금개혁 문제는 개혁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다. 이를 두고 이견이 조율되지 않아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올해 중반 발족했음에도 몇 달간 제대로 된 회의조차 열지 못한 상태였다.

4분기 들어서야 연금개혁특위가 첫 회의를 열고 주무 부처인 복지부도 관련 위원회를 출범하는 등 출발은 더딘 모습이다. 하지만 해를 넘기기 전에 논의를 시작했고 복지부 주최로 연금 전문가 포럼 등도 진행되는 만큼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개혁 논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정부는 내년 3월까지 추계를 마치고 이를 토대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마련, 내년 10월 국회에 제출한다는 목표다.

개혁 방안으로는 보험료율 인상이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다. 연금 재정의 기반이 되는 데다 24년째 9%로 동결돼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증세로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 현재 65세인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더 올리는 방안 등도 같이 고려되고 있다.

◇자금난에 시달린 공제회

주요 공제회로선 올해는 자금난에 시달린 한해였다. 공제회들은 회원들의 자금 이탈, 대출 수요 증가, 달러-원 환율 급등 등으로 투자할 자금이 부족해지면서 하반기에는 제대로 된 투자조차 하기가 힘들었다.

회원들의 자금 이탈은 시중은행과의 이자율 차이가 원인이었다. 시중은행 금리가 공제회 급여율보다 빠르게 오르면서 더 높은 금리를 찾아 이탈하는 회원 자금이 급증했다. 게다가 공제회 대출은 시중 금융권의 차입 한도에도 산입되지 않아 현금이 필요한 회원들이 대출 요청이 쇄도했다. 공제회는 회원들의 복지가 우선순위여서 대여 요청에 먼저 응해야 하는 구조다.

환율 급등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한국교직원공제회 등 주요 공제회는 주로 투자금이 필요할 때 요청(캐피털콜)하면 자금을 집행하는 구조로 해외 운용사와 약정을 맺는다. 문제는 달러-원 환율이 급등하면서 캐피털콜 자금을 집행할 때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원화 자금이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회원 이탈과 대출 증가로 현금이 부족한데 캐피털콜까지 부담이 되면서 일부 공제회는 증권사 대출까지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같은 흐름은 연말로 접어들면서 다소 완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제회들은 회원들의 자금 이탈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대출 증가세도 둔화했다며 내년 중반 정도부터는 기존 회원들의 자금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다.

◇공제회 급여율 대폭 인상

주요 공제회가 회원들에게 지급하는 이자율인 급여율을 대폭 올린 것도 올해 화제가 됐다.

현재 공제회의 급여율은 6%에 육박하는 상황이다. 공제회별로 올해 들어서만 급여율을 두세 차례 올렸는데 1년에 이처럼 급여율을 여러 번 올리는 것은 이례적이다.

행정공제회는 이번 달에 목돈 예탁급여 부가율을 1%포인트 넘게 올렸다. 지난 11월에 인상한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1%포인트 이상 인상한 것이다. 이같은 흐름은 교직원공제회, 군인공제회 등 주요 공제회에서 공통으로 발생했다.

공제회가 급여율을 이처럼 급하게 올린 것은 시중은행 예금금리와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다. 국내외 시장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은행 예금금리도 순식간에 6%를 바라보자 급여율 인상을 요구하는 회원들의 요구가 빗발치면서 공제회들도 빠르게 보조를 맞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공제회들의 운용 부담도 커지게 됐다. 급여율은 회원들이 납입하는 저축금에 복리로 붙는 이자율이다. 급여율만큼 돈을 지급하고도 적립비율을 유지하려면 급여율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해야 하는데 현재 수준이라면 내년에 6% 중반의 수익률은 기록해야 '본전치기'라도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시장 환경에 공제회들의 운용 부담은 더 가중된 셈이다.

◇계속되는 국내주식 '홀대'

국내주식을 외면하는 연기금의 투자 흐름은 올해도 이어졌다. 해외투자 비중을 늘리는 것이 연기금의 기본 방향성이긴 하지만 국내주식이 연저점을 하향 돌파할 때도 매수세로 돌아서지 않아 '구원투수' 역할을 기대하기 더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연합인포맥스의 투자자별 매매추이 화면(화면번호 3302번)에 따르면 연기금은 올해 들어 유가증권시장에서 국내주식을 2조6천823억원어치 순매도한 것으로 집계됐다. 4조3천300억원어치 순매도한 사모펀드에 이어 기관 투자자 중 두 번째로 많은 순매도액이다.

월별로 봐도 연기금이 순매수한 기간은 올해 2월과 4월 단 두 달뿐이다. 2월에는 그마저도 순매수액이 192억원에 불과했다. 제대로 순매수했다고 볼 수 있는 기간은 4천656억원을 순매수한 4월 정도에 그친다.

연기금 중 가장 덩치가 큰 국민연금의 포트폴리오 내 국내주식 비중은 연말 목표치를 이미 밑돌고 있다.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은 13.6%로 연말 목표치 16.3% 대비 2.7%포인트나 하회하는 중이다. 4분기의 연기금 순매도세까지 고려하면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비중은 더 내려갔을 가능성이 있다.

연기금의 이같은 매매 흐름은 당분간 더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는다. 국민연금이 해외투자 비중을 늘리는 기조인데다 반도체 업황이 악화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내외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 국내주식의 매력도가 당장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부동산 한파에 지갑 닫는 연기금

부동산 시장에 들이닥친 한파는 주요 연기금 및 공제회도 피해갈 수 없었다. 기존에 보유한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는 가운데 투자를 미루거나 보유 매물을 내놓는 등의 대응이 나오기도 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여의도 IFC 단지의 우선협상대상자가 된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결국 매입을 포기한 일이다. 미래에셋운용은 외부 투자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는데 연기금들이 모두 발을 뺀 여파가 컸다. 저금리에 시장 분위기가 좋았다면 연기금들이 앞다퉈 투자금을 댔겠지만, 시장이 냉각되면서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가 전반적으로 불거지면서 부동산 투자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한층 강해졌다. 지금 같은 시기에 섣불리 부동산을 매입했다가 알려지면 여론의 비판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편으로는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알짜 매물이 나오기도 했다. 교직원공제회는 4분기에 강남 오토웨이타워의 지분 50%를 매물로 내놨고 넥슨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협의하는 상황이다. 행정공제회는 알짜 매물로 평가받는 판교의 알파돔시티 내 신사옥에 대한 수익증권을 시장에 내놓기도 했다. 카카오가 '판교 아지트'로 이름 붙인 이곳은 판교에서도 가장 입지가 좋은 상업용 단지도 꼽히고 있다.

jh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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