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해의 끝자락이 다가오면서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연말 정기평가 시즌도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2022년 신용평가 결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상고하저'로 요약된다. 상반기와는 달리 하반기 들어서는 전반적인 등급상승 동력이 눈에 띄게 둔화된 가운데 실적 저하가 누적된 기업들을 중심으로 등급전망(Rating Outlook)이 종전의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변경되는 사례들이 부쩍 늘었다.

송태준 한국기업평가 IS실장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들의 실적을 보면 2021년의 호조세에 이어 2022년에도 상반기까지는 연결기준 매출액 및 영업이익 공히 전년동기대비 두 자릿수의 높은 증가율을 시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올해 한국기업평가의 회사채(무보증 선순위사채 기준) 신용평가 결과 역시 2012년 이후 10년 만에 상향우위로 전환되었고, 투자등급 군만 보았을 땐 등급상하향배율(Up/Down ratio)이 2.0배를 기록하며 2011년 이후의 최고치를 나타냈다.

주로 투자등급 군을 중심으로 한 상반기까지의 상향우위 기조 이면에는 유의미하게 개선된 기업실적이 자리하고 있다. 유례없는 저금리와 과잉 유동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코로나 효과'가 여기에 상당수준 기여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반기 들어 분위기가 급변했다. 산이 높았던 만큼 골도 깊을 수밖에 없었던 탓일까. 앞서 언급한 상장기업들의 3분기 실적을 보면 연결기준 매출액은 전년동기대비 플러스 성장세를 유지한 반면, 영업이익은 거꾸로 두 자릿수의 큰 폭 감소세로 돌아섰다. 금리인상과 인플레이션 등의 영향으로 수출 주력 품목인 반도체를 비롯, 경기민감도가 높은 업종 중심으로 이익 감소 폭이 크게 나타난 결과다.

향후의 전망도 대체로 어둡다. 고물가를 잡기 위한 긴축과 금리인상은 예상 밖의 속도로 진행되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더욱이, 현재까지의 기업실적에는 금리상승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연중 베이스로는 아직 온전하게 반영되어 있지 않다. 내년 이후의 기업실적이 우려되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요국들의 성장률 전망치가 잇따라 하향조정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와 자금조달시장 경색이 기업신용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최근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발표한 내년도 산업전망(Industry Credit Outlook)에도 이 같은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단 사업환경이 우호적인 산업은 찾아보기 어렵고, 신용등급 방향성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산업은 전무한 반면, 부정적인 산업으로 기업부문의 건설, 석유화학, 금융부문의 증권, 캐피탈, 저축은행 등이 공통적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나마 실적 방향성이 긍정적인 산업으로 조선과 호텔·면세 등 소수의 산업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 역시 전년실적과 비교한 개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일 뿐, 신용도의 유의미한 개선으로까지 이어지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단, 2023년 기업을 둘러싼 제반 환경이 비우호적일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는 기업신용도 측면에서도 당연히 부담이다. 일각에서는 '신용대란' 또는 '신용붕괴'라는 극단적인 용어마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난무하는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크레딧 채권시장이 단기간 내에 하향우위 일변도로 전환될 가능성이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주로 투자등급 군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몇 가지 단서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등급전망. 주지하다시피 등급전망은 기업들의 향후 1~2년에 걸친 신용도의 방향성을 가리킨다. 12월 23일 기준 신용평가 3사의 회사채 등급전망 부여현황을 살펴보면, 부정적 전망 수가 긍정적 전망 수를 대체로 두 배가량 웃돌고 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내년도 등급 방향성의 무게중심이 하향우위 쪽에 쏠려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투자등급 안에서만 따져보면 양자 간 격차가 크게 줄어든다. 이는 긍정적 전망은 주로 투자등급에, 부정적 전망은 투기등급에 포진되어 있는 점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올해 연말에 투자등급 군에서 부정적 전망 수가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계열지원가능성 이슈가 부각된 롯데그룹 계열사에 부정적 전망이 무더기로 부여된 결과로, 사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실제 투자등급 군 내 등급전망은 긍정적 전망 수가 부정적 전망 수를 앞서고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신용등급 조정이 안정적 전망에서 곧바로 이루어지기보다는 일단은 Non-Stable(긍정적 또는 부정적) 상태에서 일정 기간 모니터링을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2023년에 신규로 부정적 전망이 부여된다 해도 그 해에 당장 등급이 조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국내 크레딧 시장의 특성. 그간 국내 회사채 시장이 주로 A등급 이상 상위등급 위주로 재편되어 온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비중으로 보면 전체등급에서 A등급 이상의 고(高)등급 군이 9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집단에 속해 있는데, 요즘처럼 투자심리가 악화된 사장환경 하에서도 모기업 보증으로 채권을 발행하는 등 유사시에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적어도 회사채 시장 접근 자체가 어려운 비우량기업들에 비해서는 펀더멘탈 상의 강점 등 여러 비교우위 요소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한국기업평가가 분석한 등급별 주요 재무비율의 중앙값을 표본 수가 가장 많은 A등급 업체들 중심으로 살펴보면, 영업이익률, 순차입금/EBITDA 비율 등 신용평가 시 중요하게 고려되는 주요 지표들 모두 수년간에 걸쳐 추세적으로 꾸준하게 개선되어 온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코로나 이후 지난 2년여 기간에 걸쳐 축적된 기업들의 재무여력이 향후 예상되는 실적저하를 일정수준 흡수할 수 있는 버퍼(Buffer)로 작용할 여지도 존재한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신용도 전망과 관련해서는 글로벌 평가사인 무디스도 '팬데믹 과정에서 향상된 위기대응 능력 덕분에 비교적 견조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절대등급뿐 아니라 등급전망까지 포함한 넓은 개념의 기업신용도는 설사 투자등급이라 해도 하방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는 있다. 안정적 전망이 부정적 전망으로 변경되는 경우 이외에 긍정적 전망이 안정적 전망으로 후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내 회사채 시장이 갖는 다양한 강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약한 고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유사시에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은 비계열 금융사나, 최근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부동산금융 관련 양적, 질적 위험에 상대적으로 보다 많이 노출되어 있는 업종, 기업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단, 기업신용도와 관련해서는 신용평가사들의 정기평정이 이루어지는 내년 상반기가 일차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여전채 등 특정 섹터의 만기도래 규모도 큰 편이다. 특히, 현재 위험업종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건설업의 경우 1분기에 신용연계 ABCP의 만기도래가 집중되어 있어 주의를 요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채권금리와 환율, 회사채 스프레드 등 그간의 시장 불안요소들이 진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는 심리다. 위기의식은 필요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범람하는 비관론에 휩싸여 자칫 우려를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현실화시키는 일이다. 앞서 굳이 국내 크레딧 채권시장의 특색까지 거론하며 희망회로(?)를 돌린 것도 결국은 위기론에 지나치게 매몰될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계절의 봄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찾아오지만, 크레딧 채권시장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시장참가자 모두의 노력과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계묘년 새해, 대한민국 기업들의 건투를 기원해 본다.

(송태준 한국기업평가 IS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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